- 서평
중앙은행이 운용하는 통화정책은 금융시장을 비롯한 경제 전반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특히 콜금리가 통화정책의 주요 수단이 된 이후부터 그 효과는 금융시장에 즉각적으로 발휘된다. 예를 들어 지난 8월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금통위)의 콜금리인하 결정은 금리동결을 예상하고 있던 금융시장에 큰 충격을 주었다. 유동성이 풍부하고 7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4%를 상회하는 상황에서 내수침체 위기를 이유로 콜금리 인하를 단행한 것은 무리가 있는 정책임이 분명하다. 이런 금통위의 종속적 통화정책은 통화정책의 중요성과 중앙은행의 역할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하였고, 이런 상황에서 접하게 된 본서는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1998년에 출간된 본서는, 이 분야에서 이론과 실무경험을 고루 갖춘 Blinder 교수의 1996년 LSE의 Robbins Memorial Lecture에서 한 강의 내용을 정리한 것으로, 정운찬·김홍범 교수의 공동 번역의 형태로 작년에 출간되었다. Blinder 교수는 자신의 학적 역량을 토대로 연방준비제도 이사회(FRB)의 부의장으로 재직하던 때의 경험을 살려 중앙은행의 통화정책과 독립성에 대해 이론적이고도 실무적인 설명과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Blinder 교수는 중앙은행의 본질적 요소를 통화정책의 목표와 수단(제1강), 통화정책의 선택과 이용(제2강), 중앙은행의 독립성(제3강)이라는 세 가지로 들고 있다. 그에 의하면 중앙은행은 정부가 설정해 놓은 광의의 목표 하에서 사회후생을 위한 구체적인 목적함수를 만들어야 한다. 이런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경제이론이 제시하는 거시계량모형과 dynamic programming 기법을 적용시킨 통화정책의 선택이 필요하다. 그런데 경제이론에서 제시하는 전문적인 분석도구들은 그 현실적 적용에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으며, 중앙은행의 실무자들 역시 이 점을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Blinder 교수는 이론적 경제모형이 갖는 이런 한계가 중앙은행의 통화정책의 선택에서 이론적 경제모형을 배제시켜야 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고 강조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계량경제적 자료와 거시모형에 근거하여 통화정책을 결정하는 것이 임기응변식 통화정책보다는 훨씬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이런 입장을 토대로 Blinder 교수는 통화정책의 수단에 대해서도 통화주의적 입장과는 다른 입장을 표명한다. 그는 명목GDP는 현재 정의되고 있는 어떤 통화량과도 통계적 상관관계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증자료를 토대로 통화정책의 수단이 통화량이 아니라 ‘이자율’이어야 한다는 것을 지적한다. 더 구체적으로 통화정책의 기준은 잠재실질GDP를 실현시키는 ‘중립 실질이자율’이어야 하고, 이것을 중심으로 긴축적 또는 확장적 통화정책이 운용되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중앙은행의 독립성 문제에 대해서 Blinder 교수는 수단독립성이라는 측면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에 의하면 중앙은행은 정치적 기관이고, 따라서 중앙은행의 목표는 법률로써 규정되어야 한다. 즉 중앙은행은 목표독립성을 갖는 기관일 수 없다. 하지만 중앙은행이 결정한 정책은 특별한 사유가 발생하지 않는 한 외부에 의해 취소될 수 없어야 한다. 즉 중앙은행은 수단독립성을 지닌 기관이어야 하는 것이다. Blinder 교수는 중앙은행의 재량정책 때문에 인플레이션 편향(bias)이 발생한다는 경제이론을 반박하면서 중앙은행의 수단독립성의 근거를, 통화정책은 그 효과가 긴 시차 후에 나타나기 때문에 장기시계(long-term horizon)가 필요한 반면, 정치인들은 인내심이 없고 장기시계를 갖지 않는다는 점에서 찾는다. 중앙은행의 수단독립성 제고를 위해서는 정책효과가 곧바로 나타나는 금융시장의 유혹으로부터 통화정책자의 독립이 필요함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중앙은행은 장기시계를 유지해야 하는 반면 금융시장은 경제의 fundamental과는 관계없이 일시적 변덕과 투기적 버블에 취약하기 때문이다. 결국 Blinder 교수는 정부가 정해준 중앙은행의 장기 목표 하에서 장기시계와 인플레이션 회피성향을 지닌 비정치적 중앙은행이 재량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또한 중앙은행은 재량적 정책을 운용하되, 정책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공개하는 공개성과 책임성을 유지함으로써 공공에 대한 신뢰를 축적해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중앙은행의 독립성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지만, 독립성의 내용에 대한 논의가 부족하고 이에 대한 명확한 해결책이 제시되고 있지 않다. 중앙은행의 통화정책의 목표는 명시적으로 규정되어 있지만, 실제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통화정책이 운용되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중앙은행은 콜금리와 통화량을 모두 통화정책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우리나라의 현실을 감안할 때, 본서는 재경부와 한국은행과의 관계가 재정비되어야 할 필요성, 통화정책의 목표와 수단이 좀더 명확하고 개방적이어야 할 필요성 등 많은 시사점을 제공한다. 하지만 본서에서는 우리나라 금통위의 또 다른 문제점인 위원회 구성 측면에 대해서는 아쉽게도 대안적 사유를 마련해주지 못한다. Blinder 교수는 단지 FRB에 대해서 위원회식 운영이 바른 방향이라고 주장하고 있을 뿐이다. 또 하나 아쉬운 점은 저자가 경제이론과 실무의 연계를 의도적으로 강조한 나머지 규범적 경제이론을 실증적인 것으로 오해한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Persson-Tabellini의 이론은 통화정책자의 연봉을 경제성과에 연동시키자는 제안임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실제로 어느 나라에도 그러한 사례가 없음을 근거로 그 제안을 반박하고 있는 것이 그 일례이다. 또한 저자가 중앙은행의 재량적 통화정책을 옹호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하기 어렵다. 중앙은행의 재량적 통화정책에 대해서는 Friedman과 Hayek가 일찍이 비판한 적이 있었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이 몇 가지 아쉬운 점이 있기는 하지만 저자는 중앙은행의 통화정책과 독립성에 대해서 실무경험 및 통계자료를 바탕으로 경제이론을 인용하면서 명쾌한 설명을 해주고 있다. 따라서 본서는 경제학을 공부하는 학자 및 학생뿐만 아니라 중앙은행의 실무자, 금융시장 종사자들이 대체로 균형적인 시각에서 중앙은행의 통화정책과 독립성에 대해 알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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