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평
과거 냉전시대에는 이념의 대립 양상이 지금보다 단순했다. 미국과 소련을 각각 중심으로 한 소위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이 대립했으며, 당시의 정치·경제적 요인들은 이들 양축을 기준으로 분류할 수 있었다. 반면, 오늘날의 세계는 모든 면에서 양극화 체제에서 다극화 체제로 변하고 있다. “쾌도난마 한국경제”라는 제목의 이 책의 저자들 역시 단순히 이분법적으로 분류할 수 없는 성향의 인물들이라 하겠다. 기존에는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던, 자유주의, 자본주의, 시장경제, 진보, 보수, 극좌 등의 용어들은 이제 고려되는 사안에 따라 서로 다른 짝짓기를 하고 있는 듯 하다.
일단 “쾌도난마 한국경제”라는 책 제목만큼이나 특이하게도, 이 책은 정승일 박사와 장하준 교수의 대화를 월간 시사지 말의 이종태 편집장이 정리하는 형식으로 씌어졌다. 우선 저자들은 '90년대 초반 이후 진전되기 시작한 개방화가 한국경제를 외국 금융자본에 종속시켰으며, 이는 소위 주주 자본주의 등을 통해 한국기업 투자의 발목을 잡고 나아가 저성장과 낮은 고용을 초래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즉 주주들은 자신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높은 배당을 요구하며 자사의 주가를 지지하기 위해 회사로 하여금 자사 주식을 매입하게 하는 등 각종 압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영권 개입은 기업 투자를 감소시키고 나아가 경제성장 저해와 고용 감소를 가져온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또한 이 책은 신자유주의자들이 신봉하는 시장경제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저자들은 박정희 집권 당시의 고도 경제성장은 시장 주도가 아닌 정부 주도 하에서 성공했다고 전하고 있으며, 신자유주의가 옹호하는 시장은 양극화 현상을 심화시킨다고 한다. 특히 7~80년대 당시 정부의 적극적인 산업정책과 관치금융을 통해 발전 가능성이 높은 부문에 대한 집중적인 지원이 가능했으며, 이는 활발한 투자와 성장을 낳았다고 전하고 있다.
저자들만큼 고민하지는 않았으나, 독자의 한 사람으로 위의 두 가지 쟁점에 대해 나름대로 느끼고 생각한 점을 아래와 같이 이야기하고자 한다. 첫째, 금융시장 개방에 대한 이 책의 우려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이 책의 내용만으로 유추하면, 주주 자본주의를 부추겨 기업 투자를 저해하는 금융자본시장 개방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그러나 경제의 규모가 커지고 높은 부채 비율로 외환위기 당시 어려움을 겪은 기업들에게 외국인들의 국내 주식 투자를 통한 자본조달은 그 비중이 매우 높은 게 현실이다. 그렇다면 현재는 미국 자본 등과 비교할 때 뒤떨어지지만, 향후 주력 산업으로 인식되고 있는 금융산업의 발전 방안은 무엇인가? 아마도 금융산업의 경쟁력을 높이는 것이 대안이며, 경쟁력이란 경쟁 상대와 경쟁을 할 때 비로소 생기는 것이다. 예를 들어 조선, 제철 사업 역시 7~80년대 당시 한국 실정에 비춰볼 때 경쟁력이 없는 부문이라고 인식되었으나 이 부문에 과감한 집중 투자를 함으로써 경쟁력을 갖추어 고도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저자들 스스로도 7~80년대 경제 성장기에 제조업 부문의 외국 기술력을 받아들여 국내 제조업을 발전시킨 것은 시의 적절한 판단이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두 번째로, 박정희 집권 당시의 정부 주도하의 경제성장을 인용하여 시장경제 기능에 대한 회의를 나타낸 점에 대해서도 다른 해석이 있을 수 있다고 본다. 당시 정부의 경제성장 정책에 힘입어 실제로 경제 성장을 주도한 주체는 정부나 공기업이 아닌 민간 대기업들이었다. 기업들은 정부의 경제성장 우선 정책이라는 환경 하에 자신들의 이윤을 시장에서 실현시키려고 부단히 노력하였다. 결국 박정희 시대의 정부 주도하의 경제 성장은 시장 경제라는 틀 속에서 이루어졌다고 해석할 수 있다. 저자들 스스로도 언급했듯이 정부의 적극적 경제성장 정책에 더불어 기업의 노력이 함께 더해져서 비로소 7~80년대의 고도성장을 이룬 것이다. 그와 같은 기업의 이윤 극대화에 대한 동기는 기본적으로 시장경제 체제에서 부여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상의 두 가지 사안과 별도로 이 책이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은 부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자 한다. '90년대 이후 세계는 제조업의 시대에서 지식산업, 금융산업의 시대로 전환하고 있다. 이 책에서도 언급된 바와 같이, 요소 투입량의 증대에 따른 경제성장에서 총요소 생산성 증대, 즉 경제의 효율성 증대를 통한 경제 성장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지적이 많다. 자동차 산업을 제외하면 현재 한국의 주력 산업은 IT 부문과 금융산업으로 바뀌고 있다. 그리고 이들 산업의 특성상 전문성을 가진 노동인력에 대한 수요는 커진 반면 단순 노동직에 대한 수요는 상대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게다가 최근에는 많은 단순 제조업 생산 기반이 중국으로 이전되고 있다. 이처럼 IT 기술 등을 통한 생산양식 상의 변화 역시 제도나 체제의 구조적 변화만큼 중요한 데 반해 이 책에서는 이 점에 대한 논의가 상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산업혁명이 자본주의를 태동시켰지만, 증기의 발명이 없었다면 그 산업혁명이 가능했을까?
사실 이 책의 주장은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책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사안들 하나하나가 오늘날 한국경제가 직면한 중요한 이슈라는 사실이다. 또한 저자들이 다소 부담스럽거나 민감한 사안을 포함한 한국경제의 문제들을 격의없이 지적했다는 점을 높이 사고 싶다. 그러나 향후 그러한 이슈들에 대해서는 다양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본다. 혹시 어느 신자유주의자 두 명이 좌담 형식으로 똑같은 이슈를 다룬 책을 쓰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의 저자들만큼 거침없이 의견을 피력하는 신자유주의자들이 나올 때, 아마도 우리는 책꽂이에 상반된 접근을 통해 하나의 현실을 바라보는 두 권의 책을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작금의 한국경제가 직면한 현실에 대한 결론은 그 두 권의 책을 다 읽은 사람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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