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평
- 최충규
“경주에서 대구로 서울로 뉴욕으로 떠돌며, 국세청에서 재무부로 주미대사관으로 관세청으로 통상산업부로 재정경제원으로 흘러 다녔다. 나는 공직생활 28년에 주미대사관 3년을 빼고는 한 자리에 2년을 있어 본 적이 없다. 재정과 금융, 국내금융과 국제금융, 세입과 세출, 내국세와 관세 분야를 뜻과 관계없이 옮겨 다녔다. 가는 곳마다 치열한 도전과 응전에 부딪혔고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부가가치세에서 IMF까지 금융실명제에서 부동산실명제까지 금융자율화에서 금융시장개방까지 몸으로 부딪혔다. 실전 경제학이고 체험경제사였다.”
외환위기 와중에 재정경제원(현 재정경제부) 차관으로 공직생활을 마감한 저자는 자신의 공직생활 28년을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이 책의 이야기는 저자의 기억과 자료를 기초로 저자의 입장에서 저자의 견해에 따라 쓴 것이다. 저자는 근거 없는 사실이나 논리는 피하려고 근거나 출처를 미주에 밝혔으며 본문보다 주석을 다는 데 더 많은 시간이 들었다고 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개발독재에서 외환위기 때까지 경제정책이 수시로 정치권의 입김으로 흔들리고 부처 간 의견차이로 좌충우돌했던 상황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1970년대 초 일선 세무서 시절에는 국정감사를 하러 들른 국회의원들을 위해 채홍사 노릇까지 해야 했던 당시의 그릇된 현실을 소개하고 있으며 외환위기 때는 재경부 차관으로서 협상단을 이끌면서 알게 된 ‘뒷 이야기’도 담고 있다.
저자는 외환위기의 근본원인으로 8% 단일관세율과 원화의 평가절상을 지목하면서 이 두 가지 정책을 ‘최악의 정책조합’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8% 단일관세율은 국내 소비재산업의 경쟁력을 잃게 하여 폭발적인 수입을 유발하는 한편, 상대적으로 원자재 수입가격을 높여 수출경쟁력을 저하시켰다고 한다. 또한 고평가된 환율은 수입만 하면 장사가 되게 한 반면, 수출의 가격경쟁력을 더욱 저하시켰다고 한다. 이에 따라 1994년부터 국제수지는 급격히 악화되었다고 한다. 저자는 1994년부터 3년간의 경상수지는 물가와 성장률에 희생된 것이며 대내균형을 위해 대외균형이 파괴된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저자는 1993년에 전격 시행된 금융실명제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비유하고 있다. “황소는 코를 꿰서 끌고 가야지 꼬리를 잡고 끌고 갈 수가 없다. 사회가 바로 잡히면 금융실명제가 되는 것이지 금융실명제로 사회를 바로잡을 수는 없다.” 저자에 따르면 금융실명제는 지하경제 양성화를 위한 칼로 구상되었는데 실제로는 정치보복의 칼로 더 많이 사용되어 정치갈등을 확대 재생산하는 도구가 되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저자는 또한 외환위기의 도화선이 된 단자회사와 종합금융회사는 어설픈 실험이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정부는 1991년 금융시장 개방을 앞두고 ‘금융기관의 합병 및 전환에 관한 법률’(금융기관합병전환법)을 제정하였는데 이는 금융기관 간의 합병을 유도하여 경쟁력을 강화시키기 위함이었으며, 특히 과당경쟁에 휘말린 단자회사의 활로를 마련하고자 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신경제 5개년 계획’에 따라 단자회사와 종합금융회사의 업무영역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두 차례에 걸쳐 총 24개 단자회사가 무더기로 종금회사로 전환되었다. 그런데 외환업무에 경험이 없었던 이들 종금회사는 단기 차입금의 리스크도 제대로 모르고 닥치는 대로 해외 단기자금을 차입하여 결국 IMF 사태를 몰고 왔으며 엄청난 화를 자초하고 사라졌다고 한다.
그러나 단자회사와 종금회사의 악령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것 같다. 전술한 금융기관합병전환법은 이후 ‘금융산업의 구조개선에 관한 법률’(금산법)로 개정되어 현재 산업자본과 금융자본의 분리 문제가 불거져 나오고 있으며, 금융기관이 소유한 계열사 주식의 처분문제를 둘러싸고 각 정당과 재경부의 의견이 서로 달라 갈팡질팡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책의 말미에 이 책을 쓴 목적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진실을 밝히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진실을 통해 역사의 교훈을 전하기 위한 명상록이 되기를 바라며 이 글을 썼다. 경제정책을 다루는 후배들과 경제학을 공부하는 후배들에게 실제로 일어났던 일들을 중심으로 살아 있는 경제학을 말하기 위해 썼다. 나라의 경제를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는 후배들과 우리경제의 내일을 공부하는 경제학도들에게 타산지석이라도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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