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ERI 국제정세
미국의 원로 국제정치학자 브레진스키(Brzezinski) 교수가 묻는 한국의 미래 국가전략
12. 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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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근
미국의 유명한 국제정치학자요 카터 집권 시 미국 국가안보 보좌관을 역임한 Zbigniew Brzezinski 박사가 향년 84세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며칠 전 Strategic Vision: America and the Crisis of Global Power (New York: Basic Books, 2012) 라는 책을 출간 했다. 작년 가을 88세의 키신저(Kissinger)박사가 『on China』라는 대작(大作)을 출간한 것 등 미국의 원로 학자들이 몸의 늙었음과 관계없이 자신들의 지혜를 미국을 위해 백분 발휘하고 있다는 사실이 부럽다.
브레진스키 박사의 이번 저술은 특히 한국과 관련된 중요한 전략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의 관심을 끌지 않을 수 없다. 최근 국제정치학의 가장 큰 관심 주제는 미국은 과연 패권적 지위를 성공적으로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중국은 미국을 뒤이은 차세대 세계 패권국이 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다. 어느 나라가 최후의 승자가 될 것이냐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존재한다. 대중적 지식은 중국이 미국을 압도할 것이라고 보지만 전문 학자들 사이에서는 21세기 동안에도 미국의 패권이 유지될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오히려 더 우세하다.
브레진스키 교수는 이번 저서에서 비관론을 전개한 것은 아니지만, 미국이 잘못할 경우 미국은 자국의 이익을 훼손시킬 뿐 만 아니라 세계 전체를 혼란 속으로 몰아 갈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즉 미국이 국내문제를 잘 해결하고 국제적으로도 올바른 전략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에 대해 경각심을 주는 책이며 미국이 세계의 주도국가로 남아 있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후배 미국 정치가, 전략가들에게 조언해 주는 책이다.
우리나라 언론들은 브레진스키 교수가 마치 미국의 쇠퇴를 부정할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는 듯 소개하고 있지만 그렇지는 않다. 사실 브레진스키는 미국의 쇠퇴가 돌이킬 수 없는 것이 아니며 미국은 어떤 전략을 택하느냐에 따라 세계 제1의 지위를 향유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사실 2004년 간행했던, 부시의 외교정책을 격하게 비판하는 저서 『The Choice』에서 브레진스키는 “일본은 미국과의 경쟁에서 탈락했고, 유럽이 미국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정치적으로 통일을 이룩해야 할 것이며, 중국이 미국과 대결하기 위해서는 우선 두세대 동안 경제 발전에 힘써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향후 60년 이상 미국의 패권에 도전할 국가는 없다고 단언하며 미국의 국력에 대해 신뢰했었다.
이번 저서에서도 브레진스키는 비록 미국이 현재와 같은 지위를 잃는 경우, 미국을 뒤이어 세계를 주도할 나라는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미국 이후의 세계가 China의 세계가 되기보다는 Chaotic(혼동스런)의 세계가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미국이 패권을 잃을지도 모를 2025년의 국제상황을 “만약”(IF) 이라는 가정법으로 풀어나가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은 미․중 패권 경쟁의 결과에 관한 브레진스키의 가정이 맞느냐 그르냐가 아니다. 우리의 고민은 미국의 국력이 상대적으로 약해졌다고 가정할 경우, 대한민국의 국가전략은 어떤 것이 되어야 할 것이냐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 미국이 지금과 같은 패권적 지위를 유지하고, 우리나라와 동맹을 잘 유지해서 한반도 안정에 기여해 준다면 좋겠지만 그 같은 상황이 영원히 지속된다고 가정 할 수는 없는 일이며, 가정해서도 안 된다. 우리의 운명은 1차적으로 우리가 책임지고 개척해 나가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브레진스키는 미국이 쇠퇴하면서 야기될 세계 패권 질서 변화로 인한 '지정학적 위험'에 빠질 가장 대표적인 나라 중 하나로 한국을 꼽고 있다. 그는 ‘미국의 쇠퇴는 한국으로 하여금 고통스러운 선택에 직면하도록 할 것’이라 말하고 한국은 '중국의 지역적 패권을 받아들여 중국에 종속해서 사는 방안과 ‘역사적 반감에도 불구하고 일본과 관계를 더 강화하는 방안’등 두 가지 중 하나를 택해야 할 것이라고 논한다. 그러나 ‘미국의 강력한 지원이 없을 경우 일본이 중국에 맞설 수 있을지는 회의적’이라면서 그 경우 한국은 스스로의 수단으로 생존의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브레진스키는 일본은 미국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나라이며 일본과의 동맹을 유지하기 위해서 적극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국의 힘이 동북아시아에서 쇠퇴할 경우, 한국은 중국의 패권적 위압 아래 마치 청나라 시절의 조선처럼, 혹은 러시아 앞의 핀란드처럼, 중국의 영향력을 인정하고, 주권이기보다는 자치권 정도에 만족하고 연명해 나갈 방법을 택할 것이냐 혹은 독립자존을 지키기 위한 수단을 강구할 것이냐의 기로에 놓이게 될 것이다. 독립자존을 강구하기 위해서는 고전적인 세력균형이론이 가르쳐 주는 대로 일본과 동맹을 체결하는 방법 혹은 스스로 핵무장을 해서 고슴도치가 되는 것 등 두 가지 방법이 있다. 고슴도치는 우아하지는 못하지만 사자에게도 잡혀 먹히지 않을 가시가 있다. 핵무기는 약소국들에게 가시(안보)를 제공할 수 있다. 국제정치학에는 이미 고슴도치 이론(porcupine theory)이라는 것이 있다.
이 같은 난국의 도래에 대처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안은 통일을 이룩하는 것이다. 국력을 키워야 중국의 패권 앞에서 그나마 자존을 지킬 수 있을 터인데, 국력 증강의 최선책은 통일이다. 브레진스키는 한국 통일과정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할 중국은 통일 한국이 미국과의 안보 관계를 ‘감소’(reduction in their security ties with the United Sates) 하기 원할 것이라는 애매한 말을 하고 있다. 미중 경쟁 관계 속에서 한미 동맹은 '감소' 혹은 '증강' 되는 것이 아니라 ‘있거나’ 혹은 ‘없을’ 존재다. 중국의 영향력이 미국보다 더 강한데 우리가 바로 옆에 있는 세계 최강의 국가를 거역하겠다고 멀리 있을 뿐 아니라 중국보다도 약한 미국과 안보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극도로 비현실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반도 통일은 현재처럼 아직도 미국이 중국보다 막강할 때 이룩할 수 있는 것이지 앞으로 중국의 힘이 더 강해진다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 될 것이다. 그래서 지금과 같은 방향으로 국제정치가 진행될 것이라고 가정한다면 (즉 중국의 힘이 계속 부상한다고 가정한다면) 한반도가 통일을 이룩할 수 있는 역사적 시간은 그다지 많이 남지 않았다.
다가오는 선거판을 보면 우리나라의 정치가들 중에 브레진스키가 말하는 엄중한 사태가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유념하는 정치가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통일을 말하는 극소수 정치가들의 목소리는 선거판에서 들릴 둥 말 둥 미미한 수준이다. 브레진스키가 비관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국제정치 상황이 정말로 닥쳐온다면, 그때 대한민국은 복지논쟁이 아니라 국가의 삶과 죽음에 관해 우려해야 할지도 모를 절박한 상황으로 빠져들 것이다. 브레진스키의 책명대로 ‘전략적 비전’을 가진 사람이 우리나라의 지도자가 되어야만 한다. 한 대한민국 역사학자의 우국적인 말을 이글의 결론으로 삼고 싶다. “일본 침략 시대가 마감된 이래 한민족의 운명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미국의 영향력이 옅어지면 또 다시 중국에 사대하는 시대로 되돌아가야 하는가? 주변 4대 강국의 어느 일방에도 휘둘리지 않는 강력한 국가로 거듭나야 하지 않겠는가!”
이춘근 (한국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 cklee@keri.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