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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RI 지난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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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칼럼

출자규제와 의결권 승수

08. 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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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충규

1987년 4월 경제력집중 억제라는 목표 하에 출자총액제한제도가 도입된 이래 이 제도를 둘러싼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특히, 1998년 2월 제6차 공정거래법 개정으로 동 제도가 폐지되었다가 2001년 4월에 재도입되면서 이러한 논란은 더욱 증폭되었다. 최근에는 정부가 추진하는 기업 및 시장개혁의 일환으로 동 제도 관련규정의 개정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또다시 논란이 일고 있다.


최근의 논란은 지금까지 거론되었던 출자한도의 조정, 적용제외 및 예외인정 항목의 정비, 출자규제 졸업제도의 변경 외에도 소유-지배 괴리도 또는 의결권 승수를 새로운 규제지표로 도입하는 방안을 포함하고 있어 세인의 관심을 끌고 있다.


현재 논의되고 있는 의결권 승수는 의결권(재벌총수 일가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지분)을 소유권(재벌 총수일가의 실제 보유지분)으로 나눈 수치를 말한다. 정부와 학계 일각에서는 동 지표를 현행 출자총액제한제도를 대체하는 새로운 규제지표로 사용하거나, 동 지표를 기준으로 각 기업(집단)에 대한 출자규제를 차등화하거나 또는 부채비율을 기준으로 한 현행 출자규제 졸업제도를 의결권 승수 기준으로 변경하는 방안들을 검토하고 있다. 그 이유는 출자총액제한제도가 대규모 기업집단의 소유지배구조를 개선하는데 근본취지가 있고 소유권과 의결권의 괴리가 클수록 총수가 사익을 추구할 유인이 크며 그 과정에서 소액주주의 권익이 침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일리 있는 이야기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방안들에 대해 쉽게 동의할 수 없는 이유들이 많이 있다. 첫째, 출자총액제한제도의 근본취지가 소유지배구조의 개선에 있다는 것은 현 정부의 생각일 뿐이다. 노태우 정부시절에는 재무구조 개선, 김영삼 정부시절에는 소유분산 및 업종전문화, 김대중 정부시절에는 기업구조조정의 촉진이 동 제도가 추구한 목표였다. 차기정부에서는 또 어떻게 바뀔지 모를 일이다.

둘째, 출자총액규제의 목표가 어디에 있건 기업의 소유지배구조를 개선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 방법은 지금까지의 사전적이고 획일적인 행위규제의 형태를 취해서는 곤란하다. 그에 따른 부작용이 필연적으로 발생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출자를 총량으로 규제하면 생산적인 투자가 억제되고 특정지표를 기준으로 의결권을 제한하면 경영권 방어능력이 취약해져 장기적인 투자가 위축된다. 이와 같은 부작용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행위규제 방식에서 벗어나 기업내부의 지배구조를 개선하고 시장규율기능을 강화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한다. 그것이 더 효율적이고 직접적인 해결방법이다.


셋째, 의결권 승수를 새로운 규제지표로 활용하자는 아이디어는 기본적으로 소유권과 의결권(지배권)간의 괴리 자체가 문제라는 인식이 깔려있다. 그렇다면 지배주주가 주식을 공모해서 기업을 확장하고 그 기업에 대해 경영권을 행사하는 현재의 주식회사제도도 부당한 것인가? 또는 40%의 득표로 당선된 대통령은 대권의 40%만 행사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물론 소유권과 지배권간의 괴리가 클수록 지배주주의 사익추구 유인이 커진다는 것은 일부 이론적ㆍ실증적 연구에서 지적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지적들은 단지 그러한 ‘경향’이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지 ‘항상’ 그렇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정책적으로 규제해야 할 대상은 소유-지배간 괴리 자체가 아니라 그로 인해 발생할지도 모를 ‘사익추구행위’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전술한 바와 같이 사전적으로는 기업내부의 지배구조 개선과 시장규율 강화를 통해 견제하는 한편 사후적으로는 회사법, 증권거래법 등을 통해 다스려야 할 사항이다.


넷째, 의결권 승수를 새로운 규제지표로 도입하자는 측은 현재의 기업지배구조와 시장규율이 충분히 성숙되어 있지 않고, 계열사를 통한 지배주주의 높은 의결권이 이들 제도적 장치의 원활한 작동을 방해하고 있으므로 소액주주의 권익보호를 위해 한시적인 도입이 불가피하다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법원에서는 소액주주의 이중대표소송을 허용한 바 있고, 증권관련 집단소송제의 도입도 목전에 두고 있다. 소액주주 보호를 위한 제도적 장치가 이미 선진국 수준에 와있는데도 불구하고 굳이 새로운 규제장치를 도입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최근 정부와 학계에서 모범사례로 자주 거론하는 GE의 예는 소액주주의 권익보호가 지나치면 소액주주가 오히려 소외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GE는 주지하다시피 지주회사이고 자회사의 지분을 100% 소유하고 있다. 따라서 자회사에 대한 소유권과 의결권이 동일하다. GE로서는 80%의 지분만 있어도 연결납세제도의 혜택을 받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머지 20%의 지분을 추가로 확보한 것은 소액주주로부터의 집단소송을 피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다섯째, 공정위에서는 현재 부채비율을 기준으로 한 출자규제 졸업제도를 의결권 승수 기준으로 개편하는 방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재무구조 개선이 출자총액규제의 취지와 맞지 않는다는 것이 그 이유다. 시장규율이 성숙해질 때까지 또는 증권집단소송제가 도입될 때까지 한시적으로 운영하겠다던 출자제한제도를 1년이 무섭게 뜯어고치는 이유를 납득하기 어렵다. 이 제도가 현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개정과 폐지, 부활, 개편을 거치는 동안 기업들에게는 불확실성 증대요인으로 작용해왔고 정부정책의 신뢰성 저하, 규제의 유인효과 저감이라는 부작용을 노정시켜왔음에도 불구하고 1년 반 전에 신설된 졸업기준을 다시 백지화하고 새로운 기준으로 대체한다니 그저 아연실색할 뿐이다. 규제논리의 합리화도 좋지만 규제의 일관성을 견지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의결권 승수가 새로운 졸업기준으로 채택되는 경우 민간 기업집단이 주요 규제대상이 되고 총수가 없는 공기업집단은 규제대상에서 제외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 대해서도 유의해야 한다. 공기업집단은 재벌총수에 해당하는 주인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고전적 의미에서의 대리인문제가 더 심각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졸업기준의 채택으로 민간기업집단만 출자규제 대상으로 남는다면 공기업집단과의 차별시비가 발생할 소지가 높고 규제의 합리성에도 그 만큼 허점이 생기는 것이다. 그렇다면 추가로 공기업집단의 지배구조 개선을 위해 또 다른 규제가 필요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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