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신용불량자 사태와 소비자 책임
08. 4. 30.
0
이건호
배드뱅크 출범을 계기로 신용불량자의 도덕적 해이 문제가 새로이 주목을 받고 있다. 벌써부터 연체금 상환을 못하겠다고 버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심지어는 오히려 신용불량자로 등록해달라고 하는 사람까지 있다고 하니 참으로 걱정스러운 일이다. 신용사회의 근본은 돈을 빌린 사람이 이를 갚을 책임을 진다는 것인데 갚지 않을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이 있고, 이를 정부가 용인하는 제도적 뒷받침을 해줄 것이라는 기대가 정당시 될 뿐만 아니라 현실로 나타날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에 “신용”이라는 것이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혹자는 소득공제와 영수증 복권제도 등을 통해 신용카드 사용을 장려한 정부의 책임을 거론하기도 하지만, 부채를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신용카드를 남발한 신용카드회사들의 도덕적 해이가 신용불량자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우리 사회의 분위기이다. 이러한 분위기는 곧 카드부채로 인해 신용불량자의 딱지를 붙이게 된 소비자는 신용카드회사들의 이익추구에 희생된 피해자이며, 정부도 이를 방조한 책임이 있으므로 정부가 나서서 “부당한” 채무를 면제해 주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공급자 책임만을 강조할 뿐 소비자 책임은 철저히 외면하고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냉장고를 할부로 샀다고 가정하자. 냉장고가 성능이 시원치 않아서 음식물이 상했다면 이는 분명 공급자의 책임이며, 성능이 떨어지는 냉장고를 산 소비자에게 책임을 묻겠다는 것은 분명히 억지이다. 마찬가지로 구입자가 할부금을 갚지 못해서 신용불량자로 전락한 것을 가지고 지급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냉장고를 판 공급자가 잘못이지 소비자는 책임이 없다고 주장한다면 이 또한 억지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냉장고를 사겠다는 결정은 분명히 소비자의 선택이었으며, 자신이 이를 지불할 경제적 능력을 보유하고 있는지의 여부에 대한 판단 또한 분명히 소비자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신용카드는 금융이라는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냉장고와 다르다. 하지만 그 차이가 소비자의 책임을 면제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신용카드를 사용함으로써 부채를 부담한 것은 어디까지나 소비자의 자발적 선택이지 공급자의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신용카드회사들은 소비자를 신중히 선택하지 않은 것에 대해 “손실”이라는 형태로 이미 책임을 부담하고 있다. 그러나 “채무를 갚지 않을 권리”를 주장하는 소비자는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 자체를 부인한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일단 신용불량자가 된 사람들이 겪는 고통 자체는 이해를 한다고 치더라도 이들에게 채무탕감과 같은 온정적인 구제 조치를 시행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은 소비자 책임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금융시스템 자체가 존재의 기반을 잃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정부가 제시한 배드뱅크라는 해법에 대해 심각하게 우려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미 이와 같은 우려가 일부 현실화되고 있다는 사실은 소비자 책임의 부인이 곧 소비자의 도덕적 해이를 가져옴으로써 금융시스템의 근본을 흔들고 있다는 징후를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이러한 현상은 배드뱅크가 신용불량자 등록과 직접 연결되기 때문에 일어난다. 배드뱅크를 통한 채무조정의 대상이 되기만 하면 신용불량자라는 딱지가 떨어진다는 것이 채무자에게 “채무면제”라는 환상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도덕적 해이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이는 곧 현재 정부의 노력이 신용불량자의 공표되는 숫자를 줄이는 수단은 될지언정 실질적으로 신용불량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미 2000년과 2001년 두 차례에 걸쳐 신용불량자 기록 삭제라는 조치를 취해 보았지만, 이는 공표되는 신용불량자 숫자만 줄였을 뿐 오히려 금융기관의 방만한 경영을 유발하여 오늘날 신용불량자 문제의 한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 경험이 있다.
따라서 배드뱅크는 신용불량자 기록과 관계없이 실질적인 채무재조정 수단으로 이용될 수 있도록 운영되어야 한다. 상환기일의 연장이나 이자의 감면, 심지어 장기간에 걸쳐 상환노력을 보인 채무자에 대한 원금의 부분 탕감과 같은 조치까지도 신용불량에 대한 기록만 유지된다면 충분히 정당화될 수 있다. 채무 연체가 있었지만 구제 조치에 의한 단계적 상환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이루어지고, 이것이 신용 공급자의 의사결정 자료로 제공될 수 있다면 소비자 책임은 계속 남아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차제에 신용불량자 등록제도 자체를 없애는 방안 또한 심각하게 고려해보아야 할 것이다. 개인의 채무와 그 상환에 대한 기록을 유지, 보존하여 신용도에 대한 판단을 금융기관의 자율로 남겨두는 것이 국가가 나서서 신용불량자의 기준을 정하고, 또 필요에 따라 이를 수시로 변경하는 파행적인 제도의 운영보다는 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건호 (KDI 국제정책대학원 초빙교수, 한국경제연구원 초빙연구위원, khlee@keri.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