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차별화가 시장경제 원리다
08. 4.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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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승희
한국은 20세기에 빈곤에서 탈출한 몇 안 되는 나라 중 하나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 이후 15년여 동안 경제개혁을 외치면서 질주해 온 결과는 무엇인가. 지난 15년간의 경제적 성과를 각종 지표로 평가해 보면 한국경제는 표류하고 있음이 확인되고 있다. 이런 표류를 막기 위해서는 현재 우리 경제가 직면하고 있는 ‘열 가지 불가사의’의 원인을 규명해야 한다. 이런 불가사의는 어디서 오는 것인가. 이를 규명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시장경제와 경제발전 원리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한국경제 10대 불가사의]
1. 개혁과 청산의 대상인 1960~70년대 개발연대 패러다임이 ‘한강의 기적’을 가져왔다.
2. 경제민주화와 균형성장 정책기조의 선진화를 위한 경제개혁은 오히려 한국경제의 역동성을 앗아갔다.
3. 노사 평등과 화합을 강조한 경영민주화 정책에도 불구하고 노사관계는 크게 개선되지 않았다.
4. 지역 균형발전 정책 속에서도 대한민국은 ‘서울(수도권) 공화국’이 됐다.
5. 지방·이공계 대학 육성정책 속에서도 이공계를 포함한 대학의 경쟁력은 약화됐다.
6. 도·농 균형발전 정책에도 불구하고 농촌은 더 피폐해졌다.
7. 경제력 집중 억제정책 속에서도 경제력 집중은 심화되었다.
8. 대기업 규제와 중소기업 보호·육성정책은 중소기업의 경쟁력을 더 약화시켰다.
9. 형평과 분배 지향 정책이 쏟아져 나왔지만 소득 분배는 더 악화됐다.
10. 교육 평준화 속에 초·중·고생의 해외유학은 더 늘고, 강남학군의 서울대 진학률은 더 높아졌다.
경제 패러다임 무너져
시장경제의 기능은 열심히 잘하는 경제주체, 즉 ‘스스로 돕는 경제주체’와 그렇지 않은 경제주체를 차별화해 스스로 돕는 경제주체에 더욱 많은 지원을 하는 장치다. 경제발전이란 이런 차별화가 보다 엄격히 이뤄져 스스로 돕는 경제주체가 더 성공하게 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경제 발전은 경제활동과 자원의 집적·집중 과정을 의미한다. 결과를 평등하게 만들려는 지나친 분산, 균형, 경제민주화는 경제발전의 역동성을 떨어뜨리는 작용을 하게 된다.
이런 경제발전 원리로 볼 때 개발연대의 경제정책은 ‘정부는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이른바 관치에 의한 차별화 패러다임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정부는 수출을 진흥하고, 산업을 육성하며, 새마을 운동을 추진하는 데 항상 스스로 돕는, 즉 성과를 내는 자만이 대접을 받도록 정책을 운영했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80년대 후반 개발연대 패러다임의 청산 노력은 ‘관치’는 청산하되 ‘차별화’는 유지하는 방향이었어야 했다. 불행하게도 이때의 민주화 개혁은 관치 청산이라는 명분 아래 차별화 원리까지 버리는, 반(反)차별화 개혁을 추구하고 말았다. 반차별화를 구현해야 한다는 강한 명분 때문에 버려야 할 관치까지 버리지 못함으로써 ‘관치 평등화’ 패러다임에 빠지게 된 것이다. 지나친 반차별화 개혁은 스스로 돕는 자를 역차별함으로써 국민의 자력갱생 의지를 꺾고 동시에 스스로 도울 의지가 없는 사람들을 도덕적 해이에 빠지게 함으로써 경제의 역동성을 앗아갔다.
한편 87년 민주화 이후 경제민주화가 노사관계 개혁의 화두가 돼 왔다. 그러나 기업은 CEO를 정점으로 하는 수직적 명령조직이다. 바로 이점이 기업을 시장경제 발전의 핵심 동력으로 만드는 것이다. 하나의 기업에 두 명의 CEO가 있다면 이는 두 사람의 대통령이 있는 것과 같다. 경영을 민주화해 경영권을 분점한다는 것은 기업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소치다.
또 지역과 도·농 균형발전이 87년 이후 경제개혁의 화두가 돼 왔다. 그러나 지역을 균형발전 시킨다는 이름 하에 서울 외의 모든 지역을 균형 있게 키우다 보니 지역 거점화가 이뤄지지 못하고 ‘살 만한 곳’은 서울 강남밖에 없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도시에 비해 농촌이 어렵기 때문에 농촌을 지원해야 한다는 명분 아래 스스로 돕는 농가와 그렇지 않은 농가를 차별화하지 않고 일률적으로 지원함으로써 모든 농가를 도덕적 해이에 빠지게 했다.
대기업 규제와 중소기업 육성정책도 반차별화, 역차별 논리에 빠져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대기업들의 외형 성장을 막아 경제력 집중을 완화하고, 중소기업의 영역을 넓혀 경쟁력을 높이려는 반차별화 균형정책은 발전의 집적 원리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또 자본재·부품 공급자로서의 중소기업과 수요자로서의 대기업 간 유기적 관계를 무시함으로써 ‘실패할 수밖에 없는 정책’이었다.
경제발전 과정은 집적을 가져오면서도 동시에 새로운 참입자를 등장시킴으로써 집적이 과도해지는 것을 막는 과정이기도 하다. 따라서 대기업의 성장을 억제하기보다 잘하는 중소기업이 대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그리고 대기업 그룹이라도 새로운 분야에 진출함으로써 서로 견제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경제발전에 득이 된다. 그러나 우리는 대기업을 단지 30대 그룹 안에 든다는 이유만으로, 즉 열심히 했다는 이유만으로 역차별했다. 출자규제로 대기업들의 역동적 참입과 경쟁의 길이 막혀 신산업 창출이 지연됐을 뿐 아니라 경제력 집중은 사실상 더 심화됐다. 중소기업도 대기업 규제에 따른 시장 제약과 획일적 지원 때문에 도덕적 해이에 빠져 경쟁력이 더 약화된 것이다.
정부는 보호하기보다 자율과 책임 일깨워야
공교육 제도는 훌륭한 선생의 강의를 가능한 한 많은 학생이 듣도록 함으로써 사회적 후생을 높일 수 있기 때문에 좋은 것이다. 그러나 교육 기회의 균등화라는 이름 하에 결과의 평등을 초래하는 현 평준화 제도는 학생들의 수월성 경쟁을 죽이고 학생들을 하향 평준화시킴으로써 공교육의 실패를 초래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공교육의 실패는 재력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교육을 사교육 시장에서 사도록 유도함으로써 ‘부자만이 더 좋은 교육을 살 수 있는’ 결과가 빚어졌다.
사람은 남에게서 인정받기 위해 열심히 살고자 하는 것이다. 평등이나 분배 균형이라는 이름 하에 열심히 산 경제주체들이 이뤄 놓은 성과를 폄하하는 식의 개혁은 그동안 열심히 살아온 국민을 실망시킬 것이 자명해 보인다. 또 정부는 ‘약자’임을 내세워 무조건 정부의 보호에 기대려는 각계각층의 요구에 대해서도 선별적으로 대응해 각자의 자율과 책임을 일깨우고 스스로 돕는 것이 유일한 성공의 길임을 일깨워 나가야 할 때에 이르렀다고 판단된다. 정부는 민주·평등·균형이라는 이름 하에 열심히 해서 성공한 사람들의 의지를 꺾어서는 안 되며, 지나친 자비로 국민의 나태함을 조장해서도 안된다.
국민의 생각과 행동은 정부에 의해 길러진다. 정부가 매사 국민의 아픈 곳을 살펴 주고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인지 가르쳐 주게 되면 국민은 정부에 의존하게 된다. 성공은 내 잘한 덕이고, 실패는 정부의 탓으로 돌리는 국민이 되기 쉽다. 오늘날 우리 국민은 ‘스스로 돕는’ 정신은 사라지고 정부에 요구하는 것으로 날을 지새우는 형편이다. 정부는 그늘진 곳에 있는 사람들을 그늘진 곳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도와서는 안 되며, 스스로 돕도록 스스로 돕는 자를 더 배려해야 하며, 양지에 있는 사람들도 스스로 돕는 자에게 더 배려가 가도록 차별화해야 한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다. 정부 또한 스스로 돕는 자를 돕도록 노력해야 한다. 사회주의 경제가 인류 모두가 원하는 최고의 이상인 ‘평등’을 추구했으나 그 결과는 참담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18세기 영국의 유명한 철학자인 새뮤얼 존슨은 그래서 ‘지옥의 문은 선의(善意)로 포장돼 있다’는 명구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