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기업집단, 한국만 독특한가
08. 4.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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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권
2004년 공정거래위원회는 '시장개혁 3개년 로드맵'의 주요 내용을 근거로 공정거래법을 개정하였다. 시장개혁을 모토로 내세웠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공정거래위원회의 대기업에 대한 규제 권한의 유지 및 확대를 담은 내용이다. 출자규제 유지, 금융계열사의 의결권 제한 강화, 금융거래 정보요구권 재도입 및 지주회사 설립제한 유지 등이 그것들이다.
공정거래위원회는 1987년 공정거래법상 경제력집중 억제 관련 제도들을 도입한 이후 지금까지 지난 20여 년간 줄곧 재벌의 구조 및 행태에 문제가 많으며, 재벌의 한국적인 특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주장을 펴왔다. 공정거래위원회와 관 주변의 시민단체가 자주 언급하는 한국재벌의 고유 특성이라는 것은 외국 기업역사와 소유지배구조에 비추어보면 대체로 보편적인 현상들이란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보다 정확한 이해를 위해 역사적인 맥락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첫째, 한국의 재벌 특성은 총수를 정점으로 계열사간 출자를 통해 모기업과 중핵기업을 중심으로 여러 자회사를 거느리는 중층적 피라미드식 소유지배방식을 취하고 있다. 한 실증연구 결과에 따르면 1995년 27개국의 기업들을 대상으로 각국의 상장자본 기준 상위 20위 기업들을 대상으로 지분구조를 분석한 결과, 상호출자보다는 피라미드 출자가 보다 일반적인 지배주주의 계열사 통제방식이라는 실증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다수의 사업을 영위하는 복합기업조직이나 기업집단은 여러 나라에서 두루 관찰된다.
대한상공회의소의 국내 비금융상장사 574개 기업의 2000~2003년 자산수익률, 주가상승률, 매출액수익률 등 경제적 성과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소유경영기업이 전문경영기업보다 훨씬 높다. 미국 경제주간지 <비즈니스위크>의 2003년 자료를 보면 S&P 500대 기업의 경영성과에서도 소유경영기업이 전문경영기업보다 자산수익률, 주주수익률, 매출액증가율 등에서 앞서고 있다. 이러한 통계자료는 전문경영기업이 소유경영기업보다 여러 면에서 우월하다는 인식이 잘못된 것임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한국 재벌의 과도한 경제력집중 문제도 한국만의 고유한 특성은 아니다. OECD 대부분의 국가들도 국민소득이 증가함에 따라 10대 대기업의 GDP에서 차지하는 부가가치의 비중이 계속 높아지고 있다. 한 통계분석 결과에 따르면 국가별 기업규모 불평등도를 나타내는 자사기준 지니(Gini)계수와 국가별 경제성장도를 나타내는 일인당 GDP의 상관계수는 약 0.7로 나타나고 있다. 일인당 GDP가 높은 국가일수록 기업자산의 불평등도가 더욱 높게 나타난다. 이것은 국가의 경제발전 과정에서 기업규모의 불평등도가 더욱 심화된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경제가 성장하면서 기업의 규모가 자연스럽게 켜지는 기업의 집적효과는 인위적으로 막을 수도 없고 막아서도 안 된다. 세계적인 산업ㆍ금융간 융합추세 등 탈규제화되어 가는 금융현상에 맞추어 산업자본의 금융업 소유관련 규제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외국의 경우 GE, GM, Sony, Toyota 등 세계적인 기업들이 금융업 영위를 확대하는 추세이다. 스웨덴, 핀란드, 네덜란드와 같은 국가들에서는 금융회사들이 계열사 주식을 보유함으로써 외국자본으로부터 경영권을 방어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재벌의 특성으로 자주 거론되는 또 한 가지는 가족경영과 가족경영승계이다. 이것도 좀더 깊게 들여다보면 시장경제와 자본주의 체제가 성숙하기 이전의 재산권제도이며, 자본시장, 사회적 신뢰가 구축되지 않은 상황에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자본주의에 근거한 한국의 기업사는 50-60년에 불과하다.
가족경영과 가족경영승계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의 시계를 길게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 미국의 많은 세계적 대기업들은 100여 년의 가족경영과 수대에 걸친 가족경영승계를 통해 굴지의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하였다. 상당기간 가족경영과 가족경영승계를 이룬 이후에나 전문경영인에 의해 경영권이 승계된 것이다. 이러한 기업으로는 Procter and Gamble, Heinz, Unilever, AT&T, GM, Sears, Gillette, Walmart, Dow Chemical 등 너무도 많다. 이 중 하나만 살펴보자.
제임스 갬블(James Gamble)은 경제가 어려운 북아일랜드에서 이민온 침례교 목사의 아들로 1819년 신시내티에 정착 후, 그 지역의 유력한 양초 제조업자인 알렉산더 노리스(Alexander Norris)의 딸과 결혼하고 장인을 도와 양초와 비누 제조업을 시작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런던에서 신시내티로 이민온 윌리엄 프록터(William Procter)가 양초 제조업을 시작하였고, 제임스 갬블의 처제와 재혼을 하였다. 처음 갬블은 비누, 프록터는 양초 제조업에 집중하였다. 이후 갬블의 장인인 노리스의 제안으로 갬블과 프록터는 새로운 기업인 'Procter & Gamble's Manufactory'를 공동 설립하였다. 회사 설립 이후 프록터와 갬블의 처남들이 투자가로 자금을 지원했고, 1850년대에 이르러 프록터의 두 아들 윌리엄 프록터(William Procter)와 조지 프록터(George Procter), 갬블의 아들 제임스 갬블(James Gambel)이 경영에 참여한다. 이후 1882년 윌리엄의 아들인 할리 프록터(Harley Procter)가 경영에 참여함으로써 4대 경영에 들어갔다.
이러한 사실들에 비추어보면 한국 기업집단의 고유 특성이라는 것들도 외국 기업사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보편적인 현상들이다. 때문에 우리나라에만 있는 국내기업에 역차별적인 공정거래법상의 대기업규제는 더이상 지속되어야 할 명분이 없다. 공정거래위원회가 기업집단 규제에 무리하게 집착한다면 부처 이기주의와 행정편의주의 발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