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헷갈리는 한국 은행의 목표와 대안
08. 5.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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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상근
한국은행은 2004년 8월 12일과 11월 11일에 정책금리인 콜금리를 각각 0.25%포인트씩 전격적으로 인하했다. 금리인하 효과에 대한 의구심과 향후 물가상승을 우려했던 시장은 두 차례 모두 금리동결을 예상했기 때문에 허를 찔린 셈이다. 박승 한국은행 총재는 금리인하의 이유로 경기부양이 물가안정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한국은행의 최우선 목표가 경기 문제일까? 아니다. 한국은행의 단일화된 목표는 ‘물가안정’이다.
한국은행은 통화정책의 운영체제로서 1998년부터 물가안정목표제(Inflation Targeting System)를 채택했고, 정부와의 협의를 거쳐 결정한 물가안정목표를 국민에게 공표하고 달성해야만 한다. 또한 한국은행법 제1장 제1조에는 “이 법은 한국은행을 설립하고 효율적인 통화신용정책의 수립과 집행을 통하여 물가안정을 도모함으로써 국민경제의 건전한 발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물가안정’이라는 한국은행의 목적을 보다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하지만 예상을 벗어난 금리인하로 인해 한국은행이 명시적 목표인 물가안정과 실질적 관심사인 경기부양 사이에서 혼선을 빚고 있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또한 중앙은행에 대한 시장의 신뢰나 기대가 악화되면서 통화정책의 유효성이 저하되는 등의 우려스러운 상황이 연출될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한국은행의 목표를 보다 분명히 하고 이를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한 정책운용이 필요하다.
물가목표 대상에 대한 문제점도 지적되고 있다. 한국은행의 물가목표 대상은 2000년부터 소비자물가가 아니라, 곡물 이외의 농산물과 석유류를 제외한 소비자물가의 상승률을 의미하는, 근원인플레이션(Core Inflation)이기 때문이다.
한국은행은 물가목표 대상의 변경사유에 대해 농축수산물이나 석유류 등과 같이 비통화적 요인에 의해 물가가 일시적으로 변동하는 것을 통화정책으로는 통제하기 어렵다는 점을 들고 있다. 예를 들어 총수요압력이 높아져서 나타난 물가상승이라면 금리인상 등을 통해 총수요를 억제해서 물가를 잡을 수 있다. 그러나 국제유가의 상승과 같이 비용 측면의 물가상승에 대해 한국은행이 금리를 올린다고 해서 유가를 안정시킬 수도 없고 석유수출국기구(OPEC)를 통제할 방법도 전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은행의 주장은 일리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우리 국민의 대부분은 근원인플레이션 자체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하고 한국은행의 물가목표 대상지표가 근원인플레이션인지는 더더욱 모른다. 여기에 물가안정목표제를 채택한 23개국 중에 물가목표 대상지표가 근원인플레이션인 나라는 우리나라를 제외하면 태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 2개국에 불과하고, 대부분 국가들이 소비자물가를 대상지표로 삼고 있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각국의 중앙은행들이 물가안정의 목표대상으로 통제하기 쉬운 지표보다는 국민들이 보다 밀접하게 체감하고 있는 지표를 선호하기 때문일 것이다.
현행 물가안정목표제의 기간에도 문제점이 있다. 한국은행은 1년 단위의 연간 물가안정목표를 2004년부터 3년 단위의 중기 물가안정목표로 변경해서 2004~2006년의 물가안정목표를 2.5%~3.5%로 설정했다. 기간을 변경한 이유에 대해, 한국은행은 해마다 설정된 물가목표를 달성하고자 집착하면 강도 높은 통화정책 수단을 사용하게 되어 실물경제 및 금융시장의 변동성이 크게 확대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우리나라의 인플레이션 순환주기가 3년 1개월에서 3년 6개월로 추정되고 있고, 통화정책의 파급기간이 통상 1~2년인 점 등을 고려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중기 물가안정목표는 3년 평균 물가상승률이기 때문에 당해연도 물가안정에 실패하더라도 3년 평균 인플레이션이 목표범위 안에만 들어가면 된다. 예를 들어 물가상승률이 첫 해는 2%, 둘째 해는 6%, 마지막 셋째 해가 1%라서 3년 평균 물가상승률이 3.0%가 된다면, 어느 한 해라도 물가안정목표인 2.5%~3.5%에는 들어가지 못하지만, 중기 물가안정목표의 달성에는 문제가 없다.
게다가 1998년과 1999년의 경우와 같이, 한국은행이 스스로 설정한 연간 물가안정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어도 그 책임을 추궁당한 적이 없다는 점도 문제이다. 1990년에 세계 최초로 물가안정목표제를 도입한 뉴질랜드의 경우, 물가안정 목표달성에 실패하면 재무부장관이 중앙은행 총재의 해임을 요구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선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규정이 없기 때문에 한국은행 총재가 도의적으로 죄송하다고 말하기만 해도 고마울 따름이다.
사실 물가안정목표제도는 외환위기 직후 서둘러 채택한 면이 없지 않다. 또한 이 제도가 성공적으로 정착하려면 통화정책이나 중앙은행에 대한 신뢰 확보가 관건이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경기와 물가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는 한국은행의 정책운용을 보면 시장은 혼란을 느낄 수밖에 없다. 한번 잘못 끼운 단추는 다음 단추를 맞출 때 오히려 일그러진 모습만 생기지 않는가.
이제는 한국은행 정책의 목표와 집행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불합리한 점들을 면밀하게 검토한 후, 우리 실정에 적합한 한국은행법으로의 개정을 신중하게 고려해야 될 시점으로 생각된다.
한국은행을 포함한 세계 각국의 중앙은행들은 인플레이션의 해악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물가안정’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인플레이션이 심해지면 현금보유를 줄여서 나타나는 구두창비용(Shoe-Leather Costs), 자원배분의 왜곡, 가격변동에 의한 메뉴비용(Menu Costs), 조세왜곡, 혼란과 불편 등의 경제적 비용을 치러야만 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1920년대 독일, 오스트리아, 폴란드, 헝가리 등의 경우는 월평균 50%가 넘게 물가상승률이 지속되는 초인플레이션(Hyperinflation)으로 인해 전쟁보다 더 가혹한 경험도 했다. 따라서 물가안정은 한 나라 경제에 있어 매우 중요한 초석이다.
하지만 주어진 경제여건에 따라 경기가 물가보다 중요할 수 있다. 만약 한국은행이 물가를 희생하더라도 경기회복에 당당하게 노력하고 싶다면, 미국과 같이 물가와 고용(성장)을 동시에 고려하는 통화정책의 목표를 세우고 이에 부합하는 통화정책의 운영체제를 채택할 필요가 있다. 또한 한국은행이 현재의 물가안정목표제를 유지하겠다면, 근원인플레이션보다 국민이 보다 체감하는 물가인 소비자물가상승률을 대상지표로 삼아야 한다. 그리고 중기 물가안정목표제를 유지하겠다면, 3년 중에 2년 동안 물가안정목표를 달성하지 못할 경우 이를 실패로 간주해서 한국은행 총재의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의 도입을 고려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