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단일화폐의 역설 : 수우프와 마술 손톱
08. 4.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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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정석
지난 7월 19일 韓中日 3국의 학계 인사, IMF 서울 사무소장, 국내 여당 국회의원 등이 모여 한중일 3국 간 환율 협력에 관한 세미나를 개최하였다. 이 세미나의 큰 주제는 동아시아 국가의 환율 협력이나 이 날 논의된 내용 중 가장 주목할 만한 사항은 소위 ACU (Asian Currency Unit)라고 불리는 동아시아 공동화폐의 창설이었다. 97년 아시아 외환위기 이후 바람직한 외환보유고 운용에 대해 많은 의견들이 있었다. 외환위기 당시에는 부족한 외환보유고가 문제였으나, 2004년에는 외환시장 개입과 수출호조로 인해 국내 외환보유고 규모는 급속히 늘어나 2004년 12월 기준으로 1,980억 달러에 달했으며, 2005년 7월에는 2,049억 달러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외환보유고 증가 추세는 중국과 일본 등 다른 아시아 국가들 역시 마찬가지이며, IMF 자료에 따르면 한중일 3국을 포함한 아시아 국가들의 외환보유고가 차지하는 비중은 현재 전 세계 외환 보유액의 약 60%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같은 외환 보유고 증가는 외환의 유동성을 확보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아직도 외환보유고에 있어서 상당 부분이 달러표시 자산인 미국 국채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기 때문에 각국 외환 보유 자산의 가치는 달러 가치 변화에 따라 변할 수밖에 없다. 또한 급변하는 달러 가치는 수출 가격 경쟁력에 있어서 큰 영향을 미친다.
이처럼 달러 기축 통화와 관련한 리스크와 그에 대한 대안으로 주요 지역 경제권에서의 독자적 단일 화폐의 필요성은 그 동안 여러 차례 논의된 바 있다. 2004년 訪韓했던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로버트 먼델 (Robert Mundell)은 수출의존도가 높은 아시아 국가들의 환율 안정은 환리스크를 줄여주고 역내에서의 수출과 투자를 증대시킬 수 있다고 하였다. 먼델 교수는 엔화를 달러에 페그하고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의 통화를 엔화에 연동시킴으로써 아시아 국가들의 환율을 달러에 연계하여 환율 안정을 취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처럼 강도 높은 환율 공조 체제를 주장하는 먼델교수 조차도 아시아에서의 유로화와 같은 단일 화폐 실현 가능성에 대해서는 아시아 국가들의 역사적·문화적 이질성이 유럽보다 강해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한편, 2001년 미국경제학회 세미나에서 미국 하버드 대학교 경제학 교수인 케네스 로고프 (Kenneth Rogoff)는 단일화폐의 근본적인 의미에 대해 논의하였다. 먼델 교수는 단일화폐는 바람직하나 아시아 국가들이 실현하기 어렵다고 한 반면, 로고프 교수의 논문은 단일화폐에 대한 기본 개념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먼델 교수가 단일화폐의 대안으로 주장한 달러 연동 환율 시스템 역시 2005년 들어 실현된 위안화의 변동환율제로의 이행, 아시아 각국의 거시경제정책 조율의 현실적 어려움 등을 고려할 때 실현 가능성이 높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반면 로고프 교수는 특정한 대안을 제시하지는 않았으나, 단일화폐를 달성하기 위한 전제조건들을 밝혔다. 물론 이러한 조건들은 소위 최적통화이론에서 이미 논의된 대로 가격 및 임금신축성, 금융시장의 통합, 생산요소의 통합, 실물시장의 통합을 포함하고 있다1). 로고프 교수는 기존 경제학 이론에서 제시하고 있는 단일화폐를 위한 전제조건이 얼마나 실행하기 어려우며, 만약 그것들을 실행할 경우 단일화폐가 갖는 의미는 무언지에 대해서 논하였다. 무엇보다 단일 통화의 가장 큰 경제적인 목적은 서로 다른 국가 간의 무역, 자본 거래 상의 리스크를 줄이기 위함이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대로 단일화폐의 전제조건인 국가 간의 실물, 자본 시장의 통합에 의해 단일 경제가 실현된다면, 국가 간 무역이나 자본거래에 따른 리스크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아이러니컬하게도 단일화폐의 전제조건이 만족되면서 자동적으로 단일화폐를 실행할 이유가 없어지는 셈이 되고 만다. 바로 이 부분이 단일화폐의 역설 (paradox)이라고 할 수 있다.
로고프 교수는 논문에서 소위 ‘수우프와 마술 손톱’이란 우화를 인용하여 단일화폐의 역설을 설명했다. 추운 어느 겨울날 한 걸인이 어떤 농부에게 자신을 하룻밤 묵게 해주면 손톱만을 이용하여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수우프를 끓여주겠다고 했다. 일단 수우프를 끊인 걸인은 지금도 맛있지만 양념을 조금만 넣으면 완벽하겠다면서 농부에게 양념을 요구했다. 걸인은 그런 식으로 결국 닭고기와 온갖 양념을 다 집어넣고는 마지막에 자신의 손톱으로 수우프를 저었고 그 수우프는 정말로 맛있게 끓여졌다. 로고프 교수는 유로화는 바로 마술의 손톱과도 같다고 했다. 진짜 수우프를 맛있게 만든 것은 그 손톱이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유럽은 경제통합 과정에서 전기 플러그 크기에서 금융기관 감독 및 규제 시스템까지 통일하였다. 바로 이 모든 통합 노력이 바로 수우프를 진정으로 맛있게 한 양념, 즉 국가 간 실물과 자본 거래의 리스크를 줄인 진짜 요인이라고 로고프 교수는 지적했다. 유럽은 유로가 출범하기 전에 이미 경제만 놓고 보면 단일국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통합을 이루었으며, 따라서 이미 국가 간 무역이나 자본거래에 따른 리스크는 상당부분 제거된 상황이었다. 유로화는 이 같은 상황에서 출범했다고 로고프 교수는 지적했다.
그렇다면 유럽 국가들이 굳이 유로화를 만든 가장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여러 가지 이유2) 중에서 상징적인 이유가 가장 크다고 본다. 즉 국제사회에서 통용되는 화폐는 달러라는 인식에서 벗어나, 유럽 국가들만의 독립된 공동화폐를 가짐으로써 유럽 경제권이 미국에 예속되지 않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자 했을 것이라고 본다. 유로화 출범을 위해 유럽은 따로 경제통합을 추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럽경제를 통합하고 나서 달러화에 대응하는 상징적 의미로서의 기축통화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유로화라는 단일 화폐를 사용함에 따라 다른 화폐 사이의 거래에 따른 비용 절감 등이나 금융자산의 공통 표시 단위를 사용하는데서 오는 이득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득은 로고프의 지적대로 단일 화폐를 유지하기 위한 또 다른 비용, 즉 단일 화폐를 관리하기 위한 중앙은행 내지 유사기구 운용 등의 비용과 상쇄될 수 있다.
우리는 단일화폐와 경제통합 중 어느 것이 먼저 이루어져야 할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근본적으로 원하는 것은 서로 다른 나라 사이의 무역이나 자본거래에서 오는 위험을 가급적 축소하는 것이다. 단일 화폐가 그러한 목적을 이룩해 줄 수 있다고 믿는다면 기꺼이 단일 화폐 출범에 필요한 경제통합이라는 준비작업을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준비작업으로서의 경제통합 자체가 국가간 무역이나 자본거래에서 오는 위험부담을 제거한다면 우리가 굳이 추가로 단일화폐를 가질 필요가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부정적일 수 있다. 만일 상징적 의미에서 아시아 경제권의 공동 화폐가 필요하지 않다면 말이다.
설령 상징적인 이유를 포함한 그 어떤 이유로 아시아에서 단일통화를 갖기로 합의했다고 가정하자. 그러나 먼델이 지적한 대로 역사적·문화적 특성을 고려할 때, 아시아 국가들은 단일통화를 갖기 위한 경제통합과정에 있어서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한국과 일본 두 나라의 실물시장 통합의 한 부분인 FTA 조차도 지연 중인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우선은 아시아 국가 간 무역장벽 등의 거래비용을 줄이고 달러 위주의 외환보유고를 다각화하여 달러 가치 급변에 따른 리스크를 축소하는 것이 좀 더 실현 가능한 목표일 것이다. 또한 한중일 3국은 이 시점에서 단일화폐를 논의하기보다는 상대방 국가가 안정된 금융시장을 가질 수 있도록 협조하고 자국 거시경제 여건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자국 금융시장을 개방함으로써 자본시장 통합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실물·금융 부문에 걸친 시장통합 작업이야말로 국가 간 거래에 따른 리스크를 그나마 줄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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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원(2004),「EU 경제학」, p.363 참조
2) 유로화 출범으로 인한 이점은「EU 경제학」(김세원, 2004)에 정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