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소버린, 아이칸의 교훈과 국내 제도의 보완
08. 4.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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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희
지난 해 소버린과 SK의 경영권 다툼으로 단기성 투기자본에 대한 국내 기업의 경각심이 높아진 바 있다. 이어서 최근에는 칼 아이칸이 KT&G에 대해 시도한 적대적 M&A는 간간이 표출되어왔던 국내 기업의 경영권 불안을 가중시켰다. 결국 단기적 틈새시장을 엿보는 기업사냥꾼의 제안은 지난 주 주주총회에서 그들이 추천한 사외이사 중 1명을 선임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이로써 대기업들의 실물투자 위축이나 경영시계의 단기화가 단순히 기업가정신 부족이나 경영권 불안정에 대한 엄살로 치부하기보다는 취약한 국내 경영권시장 관련 제도의 현실을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고 할 것이다. 이번에 아이칸 자체적으로는 KT&G 총지분의 단지 6.6%를 확보했을 뿐이지만 48%의 지분을 끌어 모아 주주총회에서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전체 외국인지분 61%의 대부분이 아이칸에 지지표를 던짐으로써 박빙의 표대결 양상을 연출했던 것이다. 알려진 바와 같이 국내 대기업의 외국인지분율이 과반수를 넘긴 곳이 적지 않은 실정에서 이보다 심각한 위협에 직면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사실이 다시 한번 입증된 셈이다.
연이은 경영권 위협과 관련해 제기되는 우려에 대해 지배구조와 경영실적이 우수한 기업이라면 경영권 불안은 기우에 불과하다거나 기업 차원에서 가능한 적대적 인수합병에 대비한 수단들을 충분히 활용하지 않는다는 지적이 있다. 황금낙하산이나 초다수결의제도를 도입하고 있는 기업의 수가 모두 합쳐 10개 남짓에 불과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미 외국인자본의 비중이 커진 여건에서 글로벌 스탠더드의 형성과 적용추이가 주식회사제도에 예외를 두지 않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음을 외면하기는 힘들다. 민주주의 정치체제가 1인1표제에 기초하고 있다면 자본주의 주식회사체제가 1주1표제의 원칙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는 오늘날 주식회사로 대표되는 기업이 투자자 위험을 출자금 한도로 제한하는 반면 수익가능성은 무한히 열어놓음으로써 자본주의 경제를 꽃피운 인류최대의 제도적 발명품의 하나로 칭송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따라서 외국인주주를 포함해 잘 분산된 지분구조와 투기성 자본을 포함한 해외자본에 제도적으로 활짝 열린 국내 자본시장의 현실을 고려할 때, 국내 대기업들은 직접지분 또는 우호지분 확보전략만으로 안정적 경영권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음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물론 그럴수록 경영투명성과 지배구조 개선의 중요성은 더욱 부각되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이런 노력은 개별 주주로 하여금 현재의 경영전략이 장단기 기업가치 제고, 즉 수익성과 성장성에 대한 지속가능한 확신을 갖도록 하는 필요조건일 뿐이다. 적대적 인수합병 가능성이 자본시장 효율성에 미치는 긍정적 효과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가치실현에 대한 틈새시장을 노리는 단기성 투기자본에 대한 안정적 장치는 여전히 보완되어야 하는 것이 국내 기업의 형편인 것이다.
현대적 의미의 기업은 태어나면서 법인격을 부여받고 계약의 주체로서 독자적 사회기능을 가지지만 생존은 치열한 시장경쟁을 포함한 대내외 도전을 극복한 기업에게 주어진 한시적 특권일 뿐이다. 즉 기업은 생명체인 만큼 대내외 요인의 변화에 대한 적응 정도에 따라 생·노·병·사를 겪는다. 때로는 인간보다 긴 수명을 유지하지만 대부분은 인간의 수명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경험적 사실이다. 최근 국내 기업을 대상으로 한 분석에 따르면, 평균적으로 20대에 삶을 마감한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나라 기업의 기대수명이 다른 나라 기업의 그것에 비해 더욱 짧다. 한국경제가 압축성장을 이룩하고 개방의 폭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우리 기업 또한 그에 못지않은 동태적 성장과정을 겪었으니 세계 평균에 미치지 못하는 수명은 당연한 결과일 수도 있다. 또한 과거 창업한 1만개의 중소기업 가운데 단 1개만이 대기업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는 사실은 그만큼 척박한 기업여건과 극복해야 할 다양한 난관들이 우리 기업들에게 버거웠음을 반영하는 것일 수도 있다.
돌이켜보면 자본시장이 발달하지 않은 여건에서 우리 기업들은 필요한 재원을 자본금이나 직접금융보다는 차입금에 의존했다. 부채누증은 높은 부채비율로 나타났고 동아시아 금융위기를 비껴가지 못한 한국경제의 주요 취약점의 하나로 지목되기에 이르렀다. 환란 이후 처방전의 하나가 대기업의 부채비율 조정이었고 부채비율을 단기간에 낮추는데 크게 기여한 것은 유상증자와 외국인 지분의 확대였다. 그 과정에서 국내 대주주 지분은 크게 낮아졌고 환란 이전에도 정부가 권장해왔던 경제력집중 완화차원의 소유분산을 위한 주식분산은 부산물이었다. 또 다른 처방전은 경영투명성 제고와 지배구조 개선이었고 이 역시 단기간에 커다란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우량한 지배구조와 우수한 경영실적을 갖춘 기업들마저 적대적 M&A의 대상으로 떠오르고 그런 만큼 경영권 불안에 대비하기 위해 추가비용을 치러야 하는 입장에 놓인 것이 극명해진 만큼 제기된 논의가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제도로 구현되어야 할 것이다. 예컨대 마지막 해를 맞아 재평가가 이루어질 출자총액제한은 순환출자금지와 대체관계로 이해되어서는 안 될 것이며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의 분리문제 또한 지나치게 편협한 시각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우리가 처한 기업과 자본시장 여건을 고려할 때, 무엇보다 선행되어야 할 제도보완 방안은 글로벌 스탠더드를 적용함에 있어 국내외 자본의 역차별을 해소하는 방향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