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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RI 지난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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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칼럼

경제주권 대신에 소비자 개인의 주권이 필요하다

08. 4.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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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

한미 FTA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경제주권을 포기하는 일이라는 말들을 많이 한다. 그들의 눈에는 국제무역으로부터 나라를 닫아 놓는 것이 외세에 대항하는 것이고 경제주권을 지키는 것으로 보이는 모양이다.


주권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주인된 권리를 뜻하지만, 그 본래의 의미는 자유롭고 독립된 국가(state)로부터 출발한다. 다른 어떤 국가도 한 주권국가의 내정에 대해서 간섭할 수 없다는 뜻을 담고 있다. 국가간의 왕래와 소통이 작을 때는 이해하기가 쉬운 개념이었다. 그저 다른 나라의 일에 간섭하지 않으면 된다는 것이고, 또 간섭받지 않으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요즈음처럼 나라간의 관계가 왕래의 수준을 넘어서 하나의 촌락처럼 가까워진 상황에서는 주권이라는 것이 예전처럼 명확히 정의되지 못한다. 한 나라의 통화정책이 국제금융시장을 타고 다른 나라들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무조건 불간섭의 원칙을 고수할 수는 없다. 한 나라의 특정 품목 수입 금지 조치가 다른 교역국가의 경제에 심각한 연쇄반응을 가져오는 마당에 주권국가라 하더라도 아무 때나 수입금지를 할 수 있는 자유는 인정하기 어렵다.


특히 반대론자들이 한미 FTA와 관련해서 들고 나오는 경제주권 개념은 주권이라는 단어가 잘 어울리지 않는다. 그들이 말하는 경제주권이란 나라를 닫아 놓고 특정 제품의 시장을 보호하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FTA는 한 국가가 다른 국가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장벽을 거두어내자고 서로 합의하는 것이다. 사인간의 자발적 협상을 통해서 서로 가진 것을 내주는 것이 각자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 아니듯이 나라 간에 서로 장벽을 거두어 내자고 합의하는 것 역시 주권을 포기하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국제화된 사회에서는 나라를 닫아 놓을 수 있는 국가의 힘을 원천적으로 인정하지 않음을 원칙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 수도 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쉬울 것 같다. 우리나라의 각 지방자치단체들은 각자 자신의 지역을 ‘다스릴’ 권한을 가지고 있지만, 각 지역민이 자기 지역에서 생산한 것만을 구입하도록 강제하지는 못한다. 생산지역에 관계없이 소비자 개인이 알아서 선택하게 하는 것이 모든 지역의 사람들에게 이익이다. 그렇기 때문에 각 지역정부가 자기 지역 주민의 타지역 제품 구매를 막는 조례를 만들어내는 자유(또는 주권)은 허용해서는 안된다. 이제 나라 사이의 관계에서도 그런 원칙이 받아들여져야 한다.


문제가 되고 있는 투자자-국가소송이라는 것도 그렇다. FTA를 통해서 두 나라 사이에 많은 것을 약속해 놓았더라도 어느 한 쪽이 실행단계에서 지키지 않으면 다른 쪽은 속수무책이 되어 버린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투자에 관한 협정을 믿고 상대국에 투자한 사람들의 경우다. 예를 들어 협정문을 믿고 미국의 통신시설에 투자를 했는데 협정내용과는 달리 미국정부가 정책을 바꿔서 투자를 몰수하려 한다고 생각해 보자. 현재 상황에서 한국의 투자자는 원칙적으로 한국정부를 통해서 미국정부에 시정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러자면 투자자의 이익보다는 여러 가지의 정치적 외교적 고려가 작용할 수밖에 없고, 그럴수록 협정의 내용을 믿고 투자했던 투자자의 신뢰 이익은 보장받기 어렵다. 투자자-국가 소송은 투자자가 문제의 정책을 FTA 내용에 맞게 고쳐달라고 요구하는 제도이다. 그리고 정책의 당사자인은 상대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하기가 어려우니 제3의 심판자에게 심판을 맡기자는 것이다. 투자자-국가 소송이란 FTA의 실효성을 확보하기 위한 장치일 뿐 주권과는 무관하다. 그럴 때에 주권을 행사하자는 것은 자국도 동의한 FTA 협정 내용을 무시해버리자는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투자자-국가 소송에서 문제될 정도의 정책이나 법이라면 협상 당시부터 고쳐야 하는 것이 옳다.


세계화된 시대에는 경제주권이라는 말보다는 개인 주권, 소비자주권이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 우리들 각자는 나의 몸과 마음과 내 재산에 대해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되지 않는 한 내가 원하는 대로 처분할 자유가 있다. 어떤 물건을 소비할 것인지는 소비자 개인이 알아서 결정할 문제다. 외국 제품이 더 마음에 든다면 소비자가 그것을 선택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이 옳다. 의회나 행정부가 주권이라는 이름으로 외국 물품의 수입을 제한하는 법이나 제도를 만든다면 우리 국민인 각 소비자들의 선택권을 제한하는 것이다. 그건 결국 주권이라는 이름으로 국민의 기본적인 권리를 제한하는 것이 된다. 경제주권이 사라진 자리에 소비자 개인의 주권이 우뚝 서기를 기대해 본다.


김정호 (자유기업원 원장, kch@cf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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