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은행영업시간의 단축은 금융선진화에 배치돼
08. 4.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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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규
국내 은행들은 대부분 외환위기 이후 공적자금을 지원받아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한 결과 현재 수 조원의 이익을 거두고 금융선진화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하지만 은행들의 실적개선이 금융소비자에 대한 서비스 개선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면 혈세를 투입하여 부실은행들을 살린 의미가 퇴색할 수밖에 없다. 즉 금융산업의 경쟁력 개선이 소비자들에게 보다 나은 금융서비스로 되돌아와야만 의미 있는 금융선진화도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최근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금융노조)이 추진하고 있는 은행 영업 1시간 단축방안은 소비자가 바라는 금융선진화의 기대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인터넷·전화·자동화기기 등을 이용한 금융업무의 비중이 크게 늘고 있지만 아직도 소비자들에게는 창구에서의 업무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 창구 업무시간을 단축할 경우 기기사용이 익숙하지 않은 계층은 큰 불편을 겪게 되고, 은행창구는 보다 혼잡해져 서비스의 질이 저하될 것이 분명하다. 또한 일반고객뿐만 아니라 법인고객의 업무에도 지장을 주어 다른 산업의 경쟁력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산별교섭을 통해 대고객 업무 시간을 은행권 전체가 일률적으로 단축하는 것은 일종의 담합으로 은행간 경쟁을 제한하여 금융산업의 발전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소비자들이 체감하는 금융서비스의 질은 개선되지 않은 채 은행의 이익만 증가한다면 이는 경쟁을 제한하고 누리는 과점적 이익이나 다름없다. 일부 금융선진국의 경우 24시간 영업은 물론 휴일에도 영업을 하는 은행이 등장하고 있다. 노조의 주장대로 과도한 업무로 인한 열악한 근무환경이 문제라면 인력 충원, 업무 프로세스의 개선 등을 모색하는 것이 올바른 해결방법이다.
금융서비스를 제공하는 은행 등을 왜 ‘금융기관’이라고 부르는지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때로는 은행에 대한 불필요한 규제 및 보호마저 ‘기관’이라는 단어로 합리화되는 부작용도 있지만 지급결제 등의 공적 기능을 이유로 이익을 추구하는 회사임에도 ‘기관’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것이다. 금융노조는 그동안 한·미 FTA는 물론 그 이전의 여러 형태의 금융시장 개방에 대해 ‘금융기관의 공공성’을 이유로 반대해 왔다. 그런 노조가 영업시간 단축에 대해서는 왜 그 공공성을 고려하지 않는지 모를 일이다.
금융노조의 은행 영업시간 단축 방안은 개방화시대의 노동조합의 의제(議題)로도 대단히 부적절하다. 한·미 FTA 체결로 우리나라 금융산업은 한층 더 개방되고 경쟁적인 환경에 직면할 것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대고객 업무 시간 단축은 장기적으로 노동자의 고용보장 및 일자리 창출에도 오히려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 이는 노동조합도 고용의 안정성을 위해 회사의 경쟁력 및 고객서비스 향상 방안을 고민해야 하는 시대가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직도 우리나라의 영향력 있는 대형 노조는 ‘투쟁을 통한 쟁취’를 통해 존재의 의의를 찾는 경향이 다분하다. 이 같은 노동운동의 성향이 바뀌지 않는다면 경쟁적 시장에서 노조의 장기적 생존이 보장되지 않는다. 달리 표현하면, 노조의 이익이 회사 또는 소비자의 희생을 전제로 얻어지는 것이라면 이것은 단기적 이익에 지나지 않을 것이며, 장기적으로는 투쟁의 대상마저 시장에서 퇴출되어 노조자체가 존립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일부 조사에 따르면 서울의 금융경쟁력이 세계 주요 46개 도시 중 43위라고 한다. 스위스 국제경영대학원(IMD)이 발표한 국제경쟁력 보고서 또한 한국 금융 인력의 경쟁력이 '최하위 수준'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는 현재 은행들이 누리는 높은 수익에도 불구하고 그 경쟁력은 보잘 것 없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 같은 국내 금융산업의 취약점을 극복하지 못하면 금융허브의 목표는 물거품이 될 것이며, 국내 금융회사들의 생존마저 위협 당하는 상황에 닥칠지 모를 일이다. 훗날 우리나라 금융노조의 근시안적 노동운동이 반면교사(反面敎師)로 널리 회자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