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법과 제도이슈
무죄추정의 원칙과 경쟁법
09. 6.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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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혜숙
무죄추정의 원칙은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으로 형사피고인은 유죄의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된다는 원칙이다. 이러한 원칙은 대부분 협의로 해석되어 형사처벌에 관하여만 적용되기 때문에 경쟁법의 해석이나 집행과는 무관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대법원은 부당지원행위에 대하여 부과된 과징금과 관련하여 행정상 제재금의 기본적 성격을 가진다는 점을 들어 그 부과가 무죄추정의 원칙에 위반되는 것은 아니라고 판단한 바 있다.
그러나 무죄추정의 기본 정신만큼은 반드시 형사사건에 한정하여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행정사건에 있어서도 법률적 근거 없이 수범자인 국민이나 기업을 법 위반자로 의제하거나 추정·간주해서는 안 될 것이며, 국민을 잠재적 법 위반자로 추정하는 법률 규정의 입법도 매우 엄격하게 제한적으로만 허용되어야 할 것이다.
공정거래법을 보면 제4조에서 시장지배적 사업자의 추정규정을 두고 있고, 제7조 제4항에서는 기업결합과 관련하여 경쟁제한성 추정 규정을 두고 있으며, 제19조 제5항에서는 공동행위의 합의에 관한 추정규정을 두고 있다. 예컨대 시장지배적 사업자의 추정의 경우 시장점유율이 50% 이상이거나 셋 이상의 사업자 시장점유율 합계가 75% 이상인 경우 시장지배적 사업자로 추정되므로 해당 사업자가 상품가격이나 용역의 대가를 결정·유지·변경하는 등의 경우 법 제3조의2에 따라 시장지배적 지위 남용 규정의 적용을 받을 위험에 놓이게 된다. 또 기업결합과 관련한 제7조 제4항에 따른 추정의 경우 해당 기업결합 당사회사들의 시장점유율 합계에 따라 기업결합이 경쟁제한적인 것으로 추정되므로 기업결합에 대한 금지를 포함한 시정조치의 대상이 될 위험이 따르게 되며, 제19조 제5항에서는 부당 공동행위와 관련하여 합의에 관한 추정 규정을 두고 있다.
이러한 “추정”은 소송법상 직접적인 증명이 곤란한 경우 증명책임의 일반원칙을 완화하기 위한 것으로 사실상 추정과 법률상 추정으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는데, 그 중 사실상 추정은 법관이 주요사실을 인정함에 있어 경험법칙을 사용하여 이를 짐작하는 심리 과정을 의미하며 이러한 사실상의 추정은 요건사실의 존재가 확실치 못하다는 심증을 형성케 하는 “반증”에 의한 번복이 가능하다. 이에 비해 법률상 추정은 본래적 법조문의 요건사실의 직접적 입증이 어려운 경우에 이를 대신하여 그것보다도 증명하기 쉬운 새로운 입증 대상을 주어 그 입증에 성공하면 요건사실이 입증된 것으로 갈음하게 하는 입법의 기술인바, 이와 같은 법률상 추정은 반증보다 높은 수준의 입증을 요하는 본증에 의해서만 번복될 수 있다.
보다 쉽게 설명하자면 추정 규정에 따라 입증책임을 부담할 주체가 결정되는데, 형사사건의 피의자는 헌법에 따라 무죄의 추정을 받기 때문에 그 추정을 번복하고자 하는 검사가 유죄의 입증책임을 지게 되므로 검사가 판사를 확신시킬 유죄의 입증에 성공하지 못하면 피의자에게는 무죄판결이 내려지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추정을 번복할 입증책임이 그 번복을 주장하고자 하는 당사자에게 부과되는 결과, 예를 들어 공정거래법 제19조 제5항에 의하여 특정 기업이 합의의 추정을 받게 되면, 그 기업은 자신이 합의에 관여한 사실이 없다는 점, 즉 합의의 부존재를 스스로 입증하여 법원을 확신시키지 못하면 합의에 참여한 것으로 결론 지워지는 것이다. 통상 어떠한 사실의 존재에 관한 입증이 상대적으로 용이한 반면, 어떠한 사실의 부존재에 관한 입증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곤란한 것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법률상 추정에 따른 입증책임의 전환은 그에 따라 입증책임을 지게 되는 당사자에게는 실로 가혹한 처사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추정이 반드시 법적 정의와 공평의 관념에 반하는 것은 아니다. 공해소송이나 의료 과오 소송과 같이 전문적 지식을 요하는 소송 등 관련 증거나 이를 수집, 입증할 능력이 일방 당사자에게 편중되어 있는 경우, 그 상대방에게 일반적인 기준에 따라 입증책임을 부담하게 하면 사법 정의에 반하는 결과에 이를 수 있다. 공정거래법의 경우 공정거래위원회는 경쟁법에 관한 전문적 지식을 누구보다 많이 보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증거자료를 조사, 획득할 수 있는 상당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추정 규정을 두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지 의문이 없지 아니하다.
우리나라 공정거래법에서 두고 있는 이러한 추정 규정들을 외국에서도 그대로 채택하고 있는지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시장지배적 지위 사업자의 추정 규정은 물론 공동행위 합의에 관한 법률상 추정 규정은 세계적 기준에 비추어 보더라도 보편적인 제도라 볼 수 없다. 외국의 경우 법원이 사건을 판단함에 있어 사실상 추정을 하기도 하고, 경쟁당국의 내부지침에서 사실상 추정을 하도록 하는 경우는 있으나 우리나라와 같이 법률에 추정 규정을 두어 법원까지 동 추정 규정에 기속되게 하는 경우는 예외적이다. 또한 기업결합에 관한 경쟁제한성 추정 규정의 경우, EU는 오히려 수평적 기업결합심사 가이드라인 제21항에서 시장집중도 관련 지표인 HHI 수준 등은 경쟁제한성에 대한 초기 지표(“initial indicatior”)로 사용될 수 있을 뿐, 이러한 수치가 경쟁제한성에 대한 추정을 창설하지는 않는다고 명시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에도 DOJ와 FTC가 제정한 수평적 기업결합 가이드라인에서 HHI에 의한 경쟁제한성 판단 기준을 두고 있으나, 미연방 대법원의 다수 판례는 이러한 기준에 따른 추정은 반증으로서 번복이 가능한 사실상 추정으로 궁극적인 입증책임은 경쟁당국에게 있다고 판시한 바 있다.
요컨대 법률에 추정 규정을 도입할 경우, 이로 인해 입증책임이 완화되는 당사자와 전환된 입증책임을 부담하는 당사자간에 그 증거수집 능력, 조사 능력, 전문적 지식 등에 있어 현격한 차이가 있어 이를 보정하는 것이 사법적 공평에 부합하는 경우에 한하여 제한적으로만 허용되어야 한다고 보며, 그러한 기준에 비추어 보면 공정거래법상 추정 규정은 다소 행정편의에 치우친 규정이라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은 유죄판결이 확정되기 전까지는 무죄로 추정되고 유죄의 입증책임은 검사에게 있다. 행정법의 영역이라고 하여 완전히 달리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 규제상의 편의를 위해 기업 활동에 관한 “법위반 요건사실에 대한 추정”이 남용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특히 형사처벌과 연계된 행정법규에 있어서 추정 규정의 남용은 결국 무죄추정의 근본정신을 훼손하는 것임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서혜숙 (법무법인 KCL 변호사, hsseo@kcllaw.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