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사회, 자유주의 사회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사고(思考)의 쓰나미’이다. 지금의 ‘경제민주화’가 바로 그렇다. 경제민주화는 시대적 대세로 자리 잡았다. “왜 경제민주화여야 하는 가”에 대한 논쟁은 사실상 억압되고 있다. ‘헌법 119조 2항’이 논쟁을 대신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닥치고 경제민주화’가 돼 버린 것이다. 경제민주화가 성역화된 것은 여야 유력 대선 후보들이 모두 경제민주화를 대선공약으로 채택했기 때문이다.
경제민주화가 등장하게 된 과정을 복기(復棋)해 볼 필요가 있다. 경제민주화는 한나라당이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면서 전면에 등장했고, 이어진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무소속’ 박원순 후보가 당선됨으로써(2011.10.26) 한나라당은 위기를 맞이했다. 비대위의 첫 작업은 ‘보수의 색깔’을 빼는 것이었다. 경제민주화도 그 일환으로, 여러 가지 수식에도 불구하고 경제민주화는 ‘태생적’으로 정치적 산물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비대위는 당쇄신 차원에서 경제민주화에 모든 것을 걸었다. 당시 김종인 위원은 “25년 동안 방치된 헌법정신을 한나라당이 처음으로 도입하게 됐다”며 경제민주화에 각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정치권력이 센 것 같지만 실질적으로는 경제세력이 정치권력을 압도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고 진단하면서 경제민주화의 당위성을 강조했다. 또 다른 유력 인사도 “경제권력이 정치·국가권력을 압도하고 국가가 재벌의 이익에 봉사해 왔기 때문에, 경제민주화가 필요하다”며 거들었다.
선언적 성격을 띠던 경제민주화는 총선 체제로 진입하면서 ‘논리의 자기강화’ 과정을 겪는다. “왜 경제민주화여야 하는 가”에 대해 논의가 이루어진 것이다. 경제민주화의 논거로 ‘경제력 집중’과 ‘양극화’가 거론됐다. “경제력 집중과 양극화의 문제를 ‘경제민주화’로 슬기롭게 풀지 않으면 지속적 발전을 꾀하기 어렵다”는 일견 논리 정연한 명제가 만들어진다.
그러면 경제민주화의 논거는 타당한가? 경제민주화가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시점이 2011년 하반기이기 때문에, 2010년까지의 경제상황을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당시 “경제력 집중과 양극화가 위험수위에 도달했다면” 경제민주화 기저에 깔린 현실인식은 적확(的確)하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국면 전환을 위한 ‘정치수사’(rhetoric)에 지나지 않는다. 경제력집중과 양극화는 어느 사회에서나 흔히 목격되는 현상이며, 한국이 특별히 경제력 집중과 양극화가 심각하다는 실증적 근거는 없다.
근래의 양극화는 정보통신의 발달에 따른 ‘생산구조’의 변화와 세계경제의 글로벌화에 따른 ‘국제 분업’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경제가 산업화 단계를 넘어 지식기반 사회로 발전할수록 전문서비스와 같은 3차 산업의 비중이 커지면서 고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기회가 ‘소수에게’ 집중되기 때문이다. 중산층을 복원하기 위해서는 당연한 이야기지만 ‘일자리’를 늘려야 한다. 그리고 일자리는 시장이 만든다. ‘분노와 증오’를 표출한다고, 경제민주화를 외친다고 일자리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경제민주화’는 ‘경제’와 ‘민주화’의 조합으로 내적 일관성을 갖지 못한다. 이는 일종의 형용모순으로 ‘둥근 네모’와도 같다. 경제민주화는 ‘정치논리의 경제에의 역외적용’으로 압축될 수 있다. 이성에 입각한 인위적인 질서로 시장 질서를 대신하겠다는 오만이 깔려있다. 하지만 국가는 바람직한 시장 질서를 설계할 수 있을 만큼 ‘전지(全知)’하지 않다.
경제민주화는 인위적인 분배질서를 전제로 한다. 강자의 것을 덜어내 약자에게 옮겨주기 때문이다. “우는 아이에게 젖을 주겠다.”는 식이다. 국가는 서로 대립되는 경제주체 간의 이해를 조정할 만한 ‘경제계산능력’이 없다. 국가가 ‘경제민주화’ 이름으로 ‘특정 계층’의 편의를 도모하면, 이는 또 다른 갈등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경제민주화는 “국가개입주의에 지대추구행위”가 더해진 최악의 조합이 될 수 있다.
헌법 제119조는 “자유와 창의를 경제 질서의 원칙으로 하되,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로 요약된다. 따라서 1항을 뒷전으로 미루고 2항만을 앞세워 ‘경제민주화’로 네이밍(naming)한 것은 대단히 작위적이다. 2항에서 언급한 ‘필요한 경우’도 이미 정책화되었다. 공정한 경쟁질서 확립을 위한 공정거래정책, 사후적 소득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한 소득정책, 수도권의 지나친 과밀화를 막기 위한 지역 균형발전 조치들이 그것이다. 제119조 2항을 굳이 ‘개념화’한다면 ‘경제의 조화’로 압축하는 것이 적절하다. 경제민주화는 경제주체 간의 ‘경제관계의 민주화’로 보는 것이 차라리 논리적으로 정합적이다.
민주주의는 demons(군중)이 지배하는(crat) 체제인 것이다. 따라서 포퓰리즘은 민주주의의 숙명일 수 있다, 군중은 ‘증오와 분노’에 의해 흔들린다. 그리고 증오와 분노는 냉철할 수 없기에 ‘철학과 이념 및 가치’와 공존할 수 없다. ‘증오와 분노’를 다스릴 수 있는 것은 ‘위무와 약속’ 뿐이다. 정치권은 한결같이 “국민의 행복이 곧 국가경쟁력이 되도록 정책의 패러다임을 바꾸겠다”고 한다. ‘국민행복론’ 좋다. 하지만 ‘정치적 약속’이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못한다.
한나라당 비대위 시절 김종인 위원은 경제민주화를 ‘헌법정신’으로 등치시켰다. 하지만 경제민주화가 헌법정신 일수는 없다. 헌법정신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일 것이다. 경제민주화는 크게 보아 헌법조항, 작게 보아 헌법의 ‘어귀’에 지나지 않는다. 논증 없이 헌법정신이라는 당위로 제시되는 경제민주화 만큼 불편한 진실은 없다. 경제민주화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요술지팡이일 수는 없다. 오히려 시장의 활력을 해치고 갈등을 증폭시킬 수도 있다.
오늘날 우리사회가 이룬 경제적 번영은 “경제의 자유주의와 정치의 민주주의가 간섭 없이 공진화(共進化)하면서” 서로가 서로의 발전의 토대가 됐기 때문이다. 정치와 경제를 섞는 경제민주화는 공진화라는 수레바퀴에 모래를 뿌리는 격이다.
조동근 (명지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dkcho@mj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