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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RI 컬럼

전문가들이 펼치는 정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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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성장의 실패는 제도의 실패이다


인간의 감정은 믿을만하지 못하다. 개인이나 사회나 상황에 따라 감정에 이끌려서 잘못된 의사결정을 하면 후에 대가를 치르는 경우가 많다. 인간 이성도 부족하기는 마찬가지이다. 한 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인간의 짧은 지혜로는 거대한 사회적 현상을 미리 알 수도 없고, 그래서 정부 계획에도 한계가 있다. 그래서 상황에 따라 인위적인 정책을 실시하는 것보다, 효율적인 제도 세우기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런데 최근에 우리나라에서 정부가 이보다는 여론에 따라 일관성 없는 정책을 펴고 있는데, 이는 장기적으로 볼 때 바람직하지 못하다. 이 글에서는 경제성장과 실패의 원인이 제도에 있음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최근 한국경제 운용에 대한 시사점을 찾고자 한다.


그 동안 주류경제학에서는 제도는 불변이라는 가정 하에 경제현상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항상 성립되는 물리영역처럼 연구했다. 그러나 노벨상 수상자인 더글러스 노스(D. North)는 주류경제학에는 시간과 제도가 빠져 있다고 비판하면서 역사와 제도를 강조했다. 그리고 제도는 경제활동의 유인체계를 결정하는 게임법칙이며, 따라서 장기 경제성장의 근본요인이라고 주장했다. 노스에 의하면 과거 유럽의 기적은 역사상 최초로 효율적인 제도 창출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통치자의 인위적인 판단에 의지했던 나라들은 낙오되고, 효율적인 제도들을 창출했던 네덜란드와 영국 등에 의해서 서구의 발전이 주도되었다. 월러스타인(I. Wallerstein)은 역사상 패권국은 17세기의 네덜란드, 19세기의 영국, 20세기의 미국 밖에 없었다고 했는데, 이들 패권국들의 이름에 모두 ‘연합(united)’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것이 흥미롭다.


지난 20년 동안 경제학계에도 제도 연구가 붐을 이루고 있다. 이는 소위 신제도주의 경제학 연구자들이 노벨상을 많이 받고 있는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 분야의 연구자 중에 1970년대에는 하이에크(1974)와 허버트 사이먼(1978), 1980년대에는 조지 스티글러(1982)와 제임스 부케넌(1986) 등에게만 노벨상이 돌아갔다. 그런데 1990년대에는 로널드 코즈(1991), 게리 베커(1992), 더글러스 노스(1993) 등 10년 동안 5회의 노벨상이 이 분야 연구자들에게 돌아갔다. 그리고 2000년대에 들어서도 이 분야에서 에컬로프(2001), 커너먼(2002), 오먼(2005), 후르비치(2007), 윌리엄슨(2009), 오스트롬(2009) 등이 노벨상을 수상했다.


오늘날 가난의 원인도 역시 제도 실패 때문이라는 지적이 많다. 시장경제제도를 수용하지 않은 나라들이 가난하다. 그런데 시장경제를 채택한다고 해서 저절로 잘 살게 되는 것도 아니다. 효율적인 제도를 창출한다는 것은 어려운 과정이다. 최근에 타임지가 20세기를 대표하는 남미 최고의 경제학자로 선정한 페루 출신의 경제학자 에르난도 데 소토(Hernando de Soto)는 『자본의 미스터리(The Mystery of Capital): 왜 자본주의는 서구에서만 성공했는가』를 통해서 오늘날 빈국의 문제는 제도 실패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 책에서 제3세계 빈국들이 자본주의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원인으로 자본 부족을 말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고 주장했다.


제3세계 국가들이 가지고 있는 자산의 규모가 작지 않다. 약 100명으로 구성된 소토 연구팀은 5년 동안 필리핀ㆍ이집트ㆍ아이티ㆍ페루 등 4개국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보유한 자산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조사했다. 사실 가난한 나라들도 국토 위에 집을 짓고, 공장을 세워 많은 자산들을 보유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 자산의 약 80%가 불법자산이라는 사실이다. 제3세계와 과거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보유한 불법 자산의 규모를 추정한 결과, 최소한 9조3천억 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금액은 미국 유통 화폐의 약 2배이며, 세계 20대 선진국의 증권거래소에 등록된 모든 회사 자산 총액과 맞먹는다. 그리고 1989년 이후 10년 동안 제3세계에 유입된 해외직접투자 총액의 20배를 넘고, 지난 30년 동안 세계은행이 대출한 모든 대출금의 46배, 그리고 그 기간 동안 선진국의 원조 총액의 93배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라고 한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왜 그토록 막대한 자산을 보유하고도 유동자본으로 전환시키지 못하는가 하는 것이다. 이들 연구진의 결론은 축적된 자산에서 자본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명시화 과정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즉 재산권 제도가 확립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면 제3세계 국가들이 선진국의 제도를 모방해서 재산권 제도를 도입하면 될 것이 아닌가? 왜 그것이 그렇게 어려운가? 데 소토는 이것이 바로 “자본의 미스터리”라고 했다. 이들이 발견한 것은 이렇게 재산권 제도가 확립되지 못한 이유는 부정부패 때문이었다. 데 소토 팀이 실제로 관찰한 바에 의하면 필리핀에서는 개인 소유의 집을 지으려면 168단계의 절차가 필요하고, 공공기관을 53군데 거쳐야 했다. 그리고 이집트에서는 농지에 지은 주택을 뇌물을 주지 않고 정상적인 절차를 통해서 등록하는 데는 6~11년이 걸렸다. 그래서 이집트에서는 470만 명이 불법 주택에 거주하고 있었다. 윌리엄 번스타인(William Bernstein)의 『부의 탄생(The Birth of Plenty)』에는 페루의 라마에서는 집을 한 채 구매하는데 심지어 728가지 절차가 필요하다고 밝히고 있다. 이러한 제도 실패로 인해서 많은 자산이 자본으로 유동화하지 못하고, 그 결과로 공장 등 산업시설을 세울 수 있는 자본이 부족해서 해외자본에 의존하고, 결국 이익이 발생해도 결국 이자로 지급하고 계속 빈곤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우리나라도 조선후기에 극심한 부정부패로 나라를 잃은 아픈 기억이 있다. 그리고 해방 이후 이승만 정부 시절에도 부정부패가 만연해 있었다. 대만의 장개석 정부도 우월한 입장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부정부패로 인해 모택동에게 나라를 내어 주었다. 그런데 우리나라나 대만은 이 뼈아픈 과거를 반성하고, 부정부패를 뿌리 뽑겠다는 강력한 정부의 의지가 있었기 때문에 경제성장이 가능했다. 거기다가 압축 성장과정에서 각종 효율적인 제도를 도입하고 모방하고 우리에 맞게 만들어내는 데에 성공했다. 정부 실패를 최소화하고, 경쟁에서 우수성이 인정된 기업에게 합당한 보상을 해주어 차별화라고 하는 시장경제의 기본적인 원칙에 충실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런데 최근 한국 사회는 이러한 성공 원인에 대해서 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지난 총선 패배 이후에 정부는 저소득층에 대해 관심을 돌리고 있다. 물론 필요하다. 국민들이 경쟁을 수용하려면, 경쟁이 공정해야 하고, 경쟁의 결과가 너무 비참하면 안 된다. 정부는 바로 이 두 가지 원칙을 유지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즉 경쟁이 공정하게 이루어지는지 감시하고, 경쟁에서 낙오된 기업이나 개인에게 재기의 기회를 주고, 최소한의 인간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는 수준을 유지하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다. 이런 측면에서 정부가 저소득층과 소기업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다. 그러나 시장경제의 기본원칙을 무너뜨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


대통령의 한 마디에 이자율이 뚝 떨어지고, 갑자기 대기업에게 상생협력을 강제하는 식으로 인위적으로 경제를 운영하는 것은 법치가 아니라 인치로 가는 것이다. 인간의 부족한 이성과 감정에 따라 경제를 운영해서는 안 된다. 그것보다는 시장왜곡의 원인을 찾아 시장제도와 질서를 세워 장기적으로 효율성을 높여야 한다.


오늘날 기업규모에 따른 임금격차가 벌어진 근본원인은 외환위기 이후에 두드러진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생산성 격차 등에 따른 것이다. 여기서부터 시작하지 않고 도덕성과 탐욕을 문제시하는 것은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잘못 잡은 것이다. 문제의 원인을 보다 정확하게 판단하고, 시장 왜곡의 출발점을 찾아 장기적인 제도 보완에 힘을 기울이는 것이 지금 정부가 할 일이다. 우리의 문화와 실정에 맞는 효율적인 제도를 창출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자원이라고는 인적 자원밖에 없는 우리나라는 구직난 속의 구인난이 존재하는 근본원인이 무엇인지 밝혀서 제도를 보완하는 일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


김승욱 (중앙대학교 경제학부 교수/경제사학회 회장, swkim@ca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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