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ost important single central fact about a free market is that no exchange takes place unless both parties benefit."
Milton Friedman(1912~2006)
요즘 우리나라 노동시장과 관련하여 가장 주목받는 것이 바로 비정규직보호법(기간제 및 단시간 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이다. 특히 비정규직보호법 제4조 ‘기간제 근로자의 사용’ 중 2항을 적용할 것인지, 유예할 것인지가 논쟁의 핵심이다. 제4조 2항에 의하면 1항에서 정한 사유가 없거나 소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2년을 초과하여 기간제근로자로 사용하는 경우에는 그 기간제근로자는 기간의 정함이 없는 근로계약을 체결한 근로자로 본다고 되어 있다. 즉, 기간제근로자가 기간의 정함이 없는 정규직 근로자로 전환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제4조 2항에 대한 최근의 논쟁은 내재된 근본적인 문제 때문에 아무런 결론을 내리지 못할 것이 틀림없다. 이런 우려 속에 필자는 본고에서 비정규직보호법에 관한 최근 논쟁에 내재되어 있는 근본적인 문제를 지적하고 개선책을 모색하고자 한다.
경기침체와 함께 비정규직의 해고가 진행되는 상황에서 제4조 2항과 같은 정규직 전환의무가 기업에 부담으로 작용하여 더 큰 해고를 일으킬 가능성이 제기되자 정부는 근로자의 보호를 위해 법 적용을 유예해야 한다고 보았다. 여야의 지루한 정치적 협상은 예상했던 대로 아무런 결론도 내리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비정규직 근로자의 해고가 현실로 다가오게 되었다. 이런 상황을 놓고 한 신문의 사설은 “그나마도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나은 법률인데 그 실효성이 없으니 차라리 시행을 유보하자는 것은 무슨 논리인가?”라며 정부의 대응을 비꼬았다.
하지만 이런 지적은 경기침체로 고용사정이 악화된 현 시점에서 근로자, 특히 비정규직 근로자 보호의 핵심이 바로 고용유지라는 점을 간과한 주장이다. 현재 우리가 비정규직보호법에 관해 논의하는 이유는 바로 경기침체 상황에서 잘못된 법률에 의해 고용사정이 더욱 악화되는 것을 잠시나마 막아보자는 것이다. 법률 시행의 유보를 통해 궁극적인 목표인 비정규직 남용 방지와 차별시정을 얻자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목적이 불분명하고 상이한 상황은 최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의 5인 연속회의에서도 찾을 수 있다. 고용유지를 최우선 과제로 삼았던 여당과 정규직 전환을 목표로 삼았던 야당과 양대 노총, 이처럼 목표가 상이한 사람들 간의 논쟁에서 정치적인 타협은 나올 수 있겠지만 경제적으로 효율적인 결론은 결코 나올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 이는 5인 연속회의를 포함한 최근의 논쟁이 가지고 있는 두 번째 문제와도 연계된다. 최근 논쟁은 무엇보다도 “과연 누가 근로자를 가장 잘 보호해 줄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해답을 누가 찾을 것인가도 고려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노조'가 근로자를 가장 잘 보호해 줄 것이라 믿고 있다. 물론 노조는 노조원들의 보호를 최우선 과제로 삼아야 한다. 그러나 태생적으로 노조는 비노조원이나 실업자들을 포함한 전체 근로자의 이익을 대변해 줄 수는 없다. 따라서 노조원의 대부분이 정규직인 현실에서 노조가 비정규직 근로자까지 보호해 줄 것이란 기대는 가당치도 않은 바람일 뿐이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근로자를 보호해 줄 것인가? 이 부분에서 필자는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 교수의 “Free to Choose”라는 TV방송을 생각하게 된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다양한 판매자가 결국 소비자를 보호하는 것처럼 실제 근로자를 보호하는 것은 근로자의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또 다른 고용주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The real thing that protects the worker is the existence of alternative employers seeking his service, just as what protects the consumer is alternative sellers.)“. 즉, 기업은 원하는 시점에 원하는 사람을 원하는 만큼 사용할 수 있도록 경쟁할 자유를 가지고, 근로자는 자신의 필요와 능력에 맞는 직장에서 합당한 임금을 받고 일할 수 있도록 경쟁할 권리가 보장된 시장이 근로자를 가장 잘 보호한다는 것이다.
시장원리에 따른 경쟁이 보장되지 못한 노동시장에서는 그 누구도 근로자의 보호를 대신해 줄 수 없다. 우리의 현실을 보자. 비정규직 근로자들은 정규직으로 전환되지 못하고 있으며 청년들은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이 모든 문제의 근본적인 이유는 경쟁이 보장된 노동시장이 없기 때문이다. 과도한 정규직 고용보호로 인해 정규직 근로자들은 비정규직이나 신규취업하려는 청년들로부터의 경쟁에서 철저히 보호받고 있다. 이처럼 경쟁이 성립하지 않는 시장에서는 기득권을 가진 일부 근로자만 보호될 뿐이며 근로자 전체의 보호는 요원해진다.
‘경쟁이 보장된 시장’을 갖추기 위해선 여러 가지 여건이 필요한데 필자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이익을 자신이 대변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현재 비정규직보호법에 관한 논쟁은 자신의 이익을 대변할 여건이 전혀 조성되어 있지 못한 상황에서 진행되고 있다. 예를 들어 5인 연속회의를 살펴보자. 비정규직으로 일할 근로자는 바로 현재 비정규직 근로자들이며, 이들을 고용해야 하는 사람은 바로 기업이다. 그러나 5인 연속회의에서는 비정규직 근로자나 기업인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비정규직의 고용문제 해결보다는 정치적 입지 확장에 관심이 많은 3당과 비정규직보다는 정규직 조합원의 이익을 대변하려는 양대 노총이 논쟁을 벌이고 있을 뿐이다. 5인 연속회의를 통해 실질적인 결론이 나기를 기대하는 우리가 어리석은 것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상황은 프리드먼 교수가 예를 든 미국의 교육ㆍ노동위원회(Committee of Education and Labor)와 너무나도 유사하다. 미국의 교육ㆍ노동위원회는 최저임금과 관련된 수많은 논의가 진행되는 곳이다. 이 위원회에서 빈곤층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최저임금이 대폭 상향조정되어야 한다고 증언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다름 아니라 미국 최대 노동조합기구인 미국노동총연맹(American Federation of Labor)의 대표자들이었다. 이들은 저소득층의 보호를 위해 최저임금을 크게 올려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결국 근본적인 이유는 숙련도가 낮은 저임의 근로자로부터 정규직 근로자를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결국 최저임금은 상당 수준 인상되었고 이를 감당하지 못하는 소규모 영세사업장에서는 해고가 줄을 이었다. 우리의 상황과 너무나도 유사하다.
결론적으로 비정규직 근로자의 보호는 경쟁이 보장된 시장을 통해 이루어져야 하며, 이를 위해선 비정규직보호법의 이해당사자인 기업과 비정규직 근로자가 논의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 이런 여건이 조성된다면 논의를 통해 이해당사자에게 가장 효율적인 해답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해당사자 간의 논의를 통한 해결책 도출이 어렵지 않음을 보여주는 한 사례를 들어보자. 우리는 경제위기 하에서 노동시장의 성공적인 개혁의 예로 네덜란드의 바세나르협약(Wassenaar Agreement)을 흔히 얘기한다. 그런데 일부에서는 이를 사회적 협약이라고 부르면서 노ㆍ사ㆍ정 대타협의 산물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엄격히 말하면 이는 잘못된 것이다. 바세나르협약의 주체는 노ㆍ사ㆍ정이 아니라 노ㆍ사이다. 근로자를 고용하는 기업과 노동력을 제공하는 근로자 간의 대협약이며, 정부는 이런 협약이 이루어지도록 양자 간 논의의 장을 제공했을 뿐이다.
현재 진행 중인 비정규직보호법 논의도 이런 맥락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사용자와 비정규직 근로자의 대표가 머리를 맞대고 논의를 해야 하며, 이런 여건이 조성되면 이해당사자의 보호라는 측면에서 가장 효율적인 합의가 어렵지 않게 도출될 것이다. 또한 이해당사자가 아닌 정부나 정치권, 그리고 양대 노조는 이러한 논의의 결과를 겸허히 수용해야 할 것이다. 결국 선택의 자유는 우리가 가진 문제의 해결을 위해 최우선적으로 보장되어야 하는 최소한의 원리이다.
“The society that puts equality before freedom will end up with neither. The society that puts freedom before equality will end up with a great measure of both.”
Milton Friedman(1912~2006)
변양규 (한국경제연구원 연구위원, econbyun@keri.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