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6월, 해방 이후 2년여 간 내각책임제를 전제로 마련하였던 유진오 박사의 제헌헌법 초안은 이틀 만에 대통령제로 변경되었다. 당시 국회 헌법기초위원회 전문위원이었던 유진오 박사는 6월 21일 밤 한국민주당의 지도자였던 김성수 씨로부터 대통령제로의 변경을 요청받고 강력히 반발하였다. 대통령제로 바꾸기 위해서는 거의 모든 조문을 다시 검토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6월 23일까지는 헌법기초위원회 초안이 국회 본회의에 제출되어야 1948년 8월 15일에 정부수립이 가능하였다. 당시 이승만 국회의장의 대통령제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던 정치인들은 그때까지의 헌법초안에서 정부불신임과 국회해산 조항만을 삭제한 후 6월 23일 국회 본회의에 대통령제 헌법초안을 제출하였다.
결국 유진오 박사도 현실적 한계를 인식하여, 6월 25일경 비공식 채널을 통해 국회 본회의에 제출된 ‘대통령제 헌법초안’에서 세 가지 조문의 수정을 시도하였다. 이들은 대통령 긴급명령의 요건 구체화, 준예산의 가예산제도 변경, 국회의 국무총리 임명동의 및 국무총리의 국무위원 제청 등으로 모두 국회의 권한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유진오 박사는 예산제도에서 국회의 권한 강화 필요성과 중요성을 적절히 인식하지 못하였다. 당시 유진오 박사는 “국가재정과 지방자치 문제에 관해서도 나는 나의 지식부족을 통감하였다”고 회고할 만큼 예산제도에 대한 이해부족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 유진오 박사를 비롯하여 이후의 많은 헌법학자들도 권력구조에 따른 예산제도의 차이에 대해서는 충분한 검토와 이해를 결여한 것으로 보인다.1)
헌법학자들의 예산제도에 대한 이해 부족은 결과적으로 예산과 재정운용에 관해 행정부의 절대적 우위를 제도적으로 보장하였다. 1980년대 민주화 이전에는 권위주의 정치체제 하에서 행정부 주도로 예산이 운용되어 소위 개발연대의 재정운용이 가능하였다. 그리고 1990년대 이후 2000년대 중반까지는 행정부가 주도적으로 편성한 예산에 대하여 국회가 미세 조정자로서의 역할에 만족함으로써 예산에 대한 갈등은 높지 않았다. 다시 말해 예산과 재정운용에 대한 정치사회적 갈등이 고조되지 않았을 때에는 제헌헌법의 예산제도가 큰 무리 없이 적절한 역할을 수행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2000년대 중반 이후 예산과 재정운용은 여타 선진국들처럼 정치ㆍ사회의 중요한 의제로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예산운용의 기조를 성장에 둘 것인가 아니면 복지에 둘 것인가라는 근본적 대립을 넘어 이제는 4대강 사업, 무상급식, 무상교육, 서민경제 등 구체적 예산사업에 대한 갈등이 급부상하고 있다. 제헌헌법의 전통을 갖고 있는 예산제도가 과연 앞으로도 적절히 작동할 수 있을 것인가?
내각책임제는 의회의 다수당이 행정부 수반인 수상을 선출하기 때문에 입법부와 행정부가 융합되어 있다. 만약 행정부가 편성한 예산을 입법부가 수정한다면 이는 내각불신임으로 간주되고, 행정부 수반인 수상은 입법부를 해산하며 총선거를 실시한다. 이와 같이 입법부가 행정부를 불신임할 수 있는 내각책임제 하에서는 예산운용에 대해 행정부의 우위를 규정하더라도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불신임제도가 없는 대통령제 하에서 내각책임제 형태의 예산권을 행정부에 부여한다면(우리나라의 현행 헌법처럼) 입법부의 예산권은 거의 형해화(形骸化)되어 의미가 없을 것이다.
대통령제에서는 내각책임제와 달리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선출이 분리되고 또 그 권한도 분리되어(separation of power) 있다. 국회가 행정부의 예산안에 대해 큰 불만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대통령에 대한 불신임제도가 없어 대통령의 임기는 안정적으로 보장된다. 따라서 대통령제에서는 예산운용에 대해 입법부와 행정부 사이의 갈등이 크게 고조될 수 있다. 특히 대통령이 여당을 장악하지 못하거나 국회에서 여소야대의 상황이 발생하면 입법부와 행정부의 예산 갈등은 헌정질서를 위협할 정도로 증폭될 수 있다.
선진국에서는 이러한 극단적 예산 갈등을 해소하기 위하여 국회에 상당한 정도의 예산수정권을 부여하고 또 국회가 수정한 예산에 대해서는 대통령이 거부권(Veto)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국회는 대통령이 거부한 예산을 재의결할 수 있지만, 재의결 요건은 보다 엄격하기(예컨대 재적의원 2/3) 때문에 대개의 경우 거부권이 발동되면 대통령의 예산 의지가 관철된다. 대통령제에서는 이러한 거부권이 구비되어 있기 때문에 입법부와 행정부는 미리미리 협상을 통해 예산 갈등을 해소하려는 유인이 존재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국회를 통과한 예산에 대해 대통령의 거부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대신 현행 헌법에서는 국회의 예산 수정권을 제한하는 방법을 채택하고 있다. 우리나라 헌법 제57조에 의하면 국회는 행정부가 편성한 예산을 감액하고자 할 때에는 아무런 제한이 없지만 증액하고자 할 때에는 행정부의 동의를 미리 구해야 한다. 국회의 예산 수정에 대한 이러한 제한은 지금까지 극단적 예산 갈등을 억제하는 효과를 가졌다. 이러한 제한은 과연 앞으로도 계속 유효할 것인가?
대통령과 국회가 예산운용에 대해 서로 다른 가치를 갖는 경우 국회는 행정부 예산의 무차별적 삭감을 위협하며 협상력을 발휘할 수 있지만 대통령은 국회의 증액요구에 수동적으로 저항할 수 있을 뿐이다. 이는 과연 적정한 견제와 균형(check and balance)으로 볼 수 있는가? 국회가 대통령의 핵심 공약사업에 대해 일방적으로 예산을 삭감한다면 국회와 대통령의 예산 갈등은 정점으로 치달을 수 있다.2) 이는 우리나라 예산제도의 심각한 결함으로 생각된다.
향후 권력구조 개편을 위한 헌법 개정을 논의할 때는 반드시 예산제도와 함께 검토되어야 한다. 대통령제에서 예산운영과 관련되는 대통령의 권한은 긴급명령(Decree), 의제설정권(Agenda Power), 거부권(Veto) 등 세 가지로 구분된다. 긴급명령은 재정위기 상황에서 대통령에게 인정하는 예산권을, 의제설정권은 국회 예산심사에 대한 여러 가지 제한조건을, 그리고 거부권은 예산에 대한 대통령의 거부범위를 각각 의미한다. 이들을 충분히 연구 검토하여 우리 사회의 예산 갈등을 합리적으로 해소하는 굳건한 반석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옥동석 (인천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dsock@incheo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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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헌헌법의 예산 및 재정에 관한 조항들은 현행 헌법에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으며, 이들의 의미와 효과 등
에 대해서는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하여도 헌법학적 연구가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 만약 현행 국회가 여소야대의 상황이었더라면 국회는 현 정부의 4대강 사업예산을 일방적으로 삭감할 수 있
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