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 총재는 지난 해 하반기부터 금리인상 가능성을 계속 내비쳤으나 아직 1년 전의 금리 수준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고 있다. 총재는 경기부양을 위한 통화정책이 가지고 올 부작용을 여전히 우려만 하고 있다. 사실 누가 그 자리에 앉더라도 쉽게 금리 인상의 조치를 취하기란 쉽지 않다. 경기부양이라는 정치적 사회적 압박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한국은행 총재가 아무리 정치적으로 독립된 자리라 하더라도, 정부의 경제정책을 무시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임명권자인 대통령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도 없다. 게다가 일자리를 잃은 실업자들과 일자리를 찾지 못한 젊은이들의 한숨이 깊어가고 이것이 사회적 주요 이슈가 된다면, 한국은행 총재는 마냥 시장의 원리와 물가안정에만 매달리기에는 그 역시 몹시 부담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통화팽창의 부작용을 우려하기보다 금리인상을 행동으로 옮길 때다.
미국의 자산버블이 붕괴하기 시작한 2007년 말부터 우리의 본원통화는 급속히 증가하였다. 2003년부터 2006까지 매년 5% 안팎이었던 본원통화의 증가율이 2007년에는 17%에 이르렀다. 특히 경기부양책이 본격화하기 시작한 2008년 말부터 매달 전년 동기 대비 거의 20% 전후의 증가율을 보였다. M2 역시 2003년 이후 2006년까지 전년 동기 대비 6% 전후 증가하던 것이 2007년 11.2%, 2008년 14.3% 그리고 2009년 10월 말 10.5%나 증가하였다. 물가는 통화적인 현상이기 때문에 이는 조만간 물가상승 압력으로 작용할 것이다. 화폐의 교환가치, 즉 물가는 화폐의 수요와 공급에 의해 결정된다. 화폐 공급이 증가하더라도 화폐수요가 함께 증가한다면 화폐가치는 변함이 없다. 금융위기 이후 통화량이 크게 증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국내의 물가는 안정을 유지해 왔다. 이것은 민간 부문이 위기에 대처하기 위하여 화폐수요 즉 현금 보유를 증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투기적인 성격이 강하여 시장에서 빠르게 교정되며, 화폐수요는 다시 원래의 화폐수요로 돌아간다. 결국 화폐 시장에 남는 것은 통화 공급의 증대뿐이며 이것이 물가상승을 초래한다.
오늘날 파생상품의 확산과 국가 간 장단기 자금의 이동 등으로 물가와 통화량 간의 실제 관계가 예전에 비해 덜 분명해진 측면은 있다. 그러나 단기는 몰라도 2년이 넘는 중장기에는 통화량의 증감이 물가 변동에 영향을 미친다는 경험적 사실을 경제학자들과 경제 기관들은 대체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선진국들은 통화량의 변동을 물가 예측의 핵심 정보로 활용하고 있으며 실제로 이를 정책에 반영하고 있다. 우리의 경우 아직 물가상승률이 문제로 되고 있지는 않지만 2007년 말부터 크게 팽창한 통화량의 증가는 민간 부문이 현금 보유 비중을 낮추기 시작하면 조만간 우리 경제의 발목을 잡을 것이 분명하다. 금리 인상의 선제적인 조치를 취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특히 화폐의 유통속도와 통화승수 지표의 추이는 금리인상의 때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이 두 지표는 돈이 얼마나 사람들 사이에 잘 돌아가고 있는지를 나타내는 지표이다. 화폐유통속도는 명목 GDP를 통화량 M2로 나눈 것으로 화폐 1단위가 일정기간 유통되는 평균 횟수, 즉 통화량의 회전율을 나타낸다. 화폐유통속도는 2000년 이후 2007년까지 늘 0.8 이상이었다. 그러던 것이 어제(2010년 1월 21일) 발표된 한국은행의 금융통계 자료에 의하면, 금융위기가 확산되기 시작한 2008년 1/4분기에 0.78로 떨어지더니 2009년 1/4분기에는 0.687까지 하락하였다. 돈은 많이 풀렸지만 잘 돌지는 않았던 것이다. 신용 경색은 경제위기가 닥쳤을 때 경제주체들이 가장 먼저 취하는 당연한 반응이다. 미래가 불확실한 마당에 소비와 투자를 마냥 전과 같이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허리띠를 졸라매면서 현금 잔고를 늘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이다. 그러던 것이 2009년 2/4분기부터 돈의 회전이 조금씩 활기를 띄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풀렸던 돈이 실물부문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기 때문에 반가울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반대로 민간 부문이 현금 보유 비중을 줄이기 시작했다는 것으로 금융위기 때 증가한 화폐 수요가 감소함을 의미한다. 이것은 결국 물가 상승에 압박을 가할 것이다. 화폐유통속도가 조만간 금융위기 직전의 수준까지 이른다면, 경제위기 동안 크게 팽창한 통화량 증가율과 실질 경제성장률 간의 간극은 물가 상승의 우려를 현실로 바꿀 것이다. 통화승수 역시 화폐유통속도의 지표와 비슷한 추이를 보이고 있는 것도 개인이 현금보유 비중을 줄이기 시작하였음을 시사한다. 금리인상을 서둘러야 하는 이유이다.
무엇보다 금리 인상이 필요한 이유는 정책 당국에 의한 의도적인 낮은 금리가 교묘하게 경제 전반에 걸쳐 자원과 부의 배분을 왜곡시키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 재정정책보다 더 고약하다. 경기부양을 위한 재정정책은 단순히 한 쪽 것을 뺏어서 다른 쪽에 주는 것에 따른 비효율적인 자원배분의 손실이지만, 인위적인 낮은 금리는 어떤 면에서 시장경제 자체를 파괴하는 조치이다. 왜냐하면 시장경제의 핵심은 가격 기능이며, 시장 금리는 자본시장에서 가격의 신호 기능과도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미래의 불확실이 고조되는 경제위기에는 개인의 시간선호율이 높아진다. 시간선호율은 현재에 대한 미래의 할인율로서 고유한 인간행동의 영역이며 정부의 어떤 통화정책과도 무관하다. 자유 시장에서 이자율은 시간선호율에 수렴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시중은행의 이자율도 함께 인상되는 것이 시장의 자연스러운 위기 치유 과정이다.
우리는 금융위기가 왜 초래되었는지를 다시 돌아보아야 한다. 당국의 의도적인 낮은 금리는 기업가나 소비자로 하여금 미래를 낙관하게 만들어 투자와 소비의 과오(過誤)를 초래한다. 이것은 신용팽창에 의한 물가상승과 함께 자산 가치를 부풀려 위기의 뇌관으로 작용한다. 더욱이 낮은 금리는 저축의욕을 약화시켜 자본축적의 기반을 허약하게 한다. 어떤 경우에도 저축은 자본축적의 기반을 마련해줌을 명심해야 한다. 거품이 꺼지게 되면, 미래의 낙관은 갑자기 비관으로 바뀌게 되고 모든 경제주체는 현금 보유의 비중을 급속히 증가시킴에 따라 위기는 재현된다.
거의 1년 동안 기준금리가 2%에 머물고 있다. 저금리 정책의 지속은 자본축적의 기반을 부실하게 하고 자산버블의 가능성을 초래하며 자원의 비효율적인 배분에 의한 손실을 초래한다는 사실을, 즉 장기적으로 경제기반을 허약하게 한다는 점을 이제 정책의 전면에 내세울 때다. 단기적인 경제적ㆍ사회적 충격을 축소하기 위한 저금리의 유지는 지금까지 만으로도 충분하다. 돈이 본격적으로 돌기 시작하는 조짐이 보일 때, 통화 당국은 이제 시장의 자연스러운 흐름에 순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금리인상을 고려해야할 때다. 병 주고 약 주는 일이 만성적으로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
배진영 (인제대학교 국제경상학부 교수, econbjy@inje.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