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그에게 이식을 위하여 돈을 꾸이지 말고 이익을 위하여 식물을 꾸이지 말라.”(구약성서, 레위기 25장 37절; 신명기 23장 19-20장)
지난 달 미국에서는 새 금융개혁법이 발효되었다. ‘도드-프랭크 법안(Dodd-Frank Bill)’으로 불리는 이 법은 2007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에서 시작되어 2008년 리먼브라더스 사태로 이어진 금융위기의 산물이다. 과거의 금융위기에서 그랬듯이 금융위기 재발방지를 위한 규제들이 만들어진 것이다. 금융위기는 금융규제를 낳고, 또 다른 위기가 오고 새로운 규제가 만들어지는 역사의 패턴을 따르고 있다. 그러면 우리는 역사에서 아무런 교훈도 얻을 수 없는 것인가?
사전이나 교과서는 금융을 “자금을 빌리거나 빌려주는 행위” 혹은 “돈의 융통”, 조금 전문적 용어를 사용하여 “신용을 기초로 하여 자금을 대차하는 일” 등으로 정의한다. 이 같은 행위는 일시적인 자금잉여 또는 부족으로 인한 지출 변동을 줄여 소비나 기업경영을 안정시키고, 인적ㆍ물적 자본에 대한 투자 기회를 확대하여 경제에 기여한다. 월급이 은행통장으로 직접 입금되고, 대부분의 지출을 신용카드로 결제하고, 또 저축의 투자수익을 높이기 위해 다양한 금융상품의 수익률을 비교하는 현대인들에게 이제 금융은 일상이다.
그런데 금융은 본질상 현재와 미래 간의 거래이기 때문에 금융거래는 믿음을 전제로 성사된다. 그러나 약속 형태의 계약은 이행되지 않을 수도 있는 내재적 위험을 안고 있게 마련이다. 금융거래에 내재되어 있는 이 약속 불이행 위험의 원인을 현대경제학은 정보의 비대칭성에서 찾지만 보다 본질적 원인은 인간의 본성과 금융거래에 대한 사회적 인식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자금이 필요하여 급하게 빌릴 때의 마음과 급한 상황이 지나가고 빌린 돈을 갚아야 할 때의 마음이 같지 않은 것이 인지상정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상거래를 업으로 하지 않는 일반인들의 경우 금융거래에 수반되는 이자에 대해 매우 부정적 인식을 갖고 있게 마련이다. 이는 인류 진화의 초기단계에서의 공동체적 삶과 관련하여 형성된 가치관에서 파생된 인식일 것이다.
앞의 인용-금융거래의 가장 중요한 동기인 이자 수취를 금하는 유대인의 계율-도 그 같은 유대공동체의 윤리관을 반영한다. 공동체 구성원들 사이에는 이자를 받지 말라는 것이다. 자본주의를 발전시킨 서구문명의 근간인 기독교에서도 그 윤리관은 그대로 이어져 이자수취는 바로 고리대였고, 고리대는 죄악이었다. 유럽에서 상업이 발전하여 금융거래가 활발해진 중세 말기 로마 가톨릭교회는 교회법에서 명시적으로 고리대 금지를 선언하였고, 금융업은 유대인의 영역이 되었다. 서구문명의 또 다른 축인 그리스ㆍ로마 전통에서는 이자수취가 양심의 가책을 느껴야 할 행위는 아니었을지라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서 화폐의 불모성과 이자수취에 대한 부정적 언급에서 그리스 지식인 계층의 금융에 대한 인식을 엿볼 수 있다. 그는 화폐는 생산적인 것이 아니며, 따라서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취하는 행위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정의롭지도 못하다고 주장했다.
부정적 사회인식 하에서의 금융거래는 그만큼 더 위험하다. 계약불이행에 따른 분쟁을 조정해야 할 법관들도 상거래나 금융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점에서 종교지도자들이나 철학자들과 다르지 않기 때문에 채무자의 입장을 동정하기 쉽다. 그래서 금융계약이 법의 보호를 받기가 어렵게 된다. 그런 경우 금융거래에는 이자에 위험수당까지 더해질 것이다. 하지만 금융에 대한 사회적 환경이 비우호적이어서 위험이 크다고 금융거래의 필요성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금융에 대한 수요는 경제활동이 자급자족적 농업을 넘어 상거래가 활발해지고 시장이 발달하는 것과 비례하여 늘어나게 되어 있다. 이렇게 늘어난 수요를 충족시킬 금융거래가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만큼 위험수당을 포함하는 높은 이자뿐 아니라 법을 대신할 보장을 필요로 하게 된다. 돈을 빌려주는 대부자의 입장에서는 담보(전당 혹은 저당)를 요구할 수 있다. 유럽을 호령하던 강력한 군주들도 전쟁 수행을 위해 필요한 자금을 은행에서 빌릴 때는 이러한 조건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군주의 채무상환을 강제할 아무런 수단도 갖지 못한 은행가들에게는 보다 확실한 담보가 필요했다. 농토나 조세징수권 등이 좋은 담보였다. 그러나 담보제도가 일회성이 아닌 반복되는 상인들 간의 금융거래에 대한 해결책은 아니다. 하지만 반복적 거래는 채무이행의 평판을 만들고 이는 신용거래의 근거가 될 수 있다. 상인들 사이에 신용거래의 관행이 만들어지면, 금융거래의 확대는 어떻게 신용할 만한 차입자의 범위를 넓힐 수 있느냐에 달려 있게 된다. 그래서 고안해낸 방법이 보증인, 어음의 이서, 금융 중개인, 그리고 1300년경 발달한 피렌체의 은행업일 것이다.
역사적으로 금융의 발전이 사회의 금융에 대한 비우호적 태도로 발생하는 문제에 대한 대응이었다는 사실은 경제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르네상스기의 금융발전이 교회법의 금융규제의 회피수단으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채권을 보호해 주지 못하는 세속법의 대체물로서의 발전이었던 것이다. 20세기의 금융발전도 크게 다르지 않다. 많은 금융시장과 금융상품이 정부 규제의 의도하지 않은 결과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산업자본주의의 발전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금융은 그 부산물로서 금융위기도 만들어냈다. 금융위기 때마다 정부는 위기의 재발을 방지하려는 취지로 여러 가지 새로운 제도와 금융규제를 도입하곤 하였으나 항상 의도했던 결과를 얻었던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1907년 금융위기는 미국도 중앙은행제도(연방준비제도)를 갖게 만들었으나 당초의 기대와는 달리 또 다시 1930년 대공황을 맞게 되었고, 대공황은 미국 금융제도에 많은 정부규제가 도입되는 계기가 되었다. 글래스-스티갈법(Glass-Steagall Act)으로 더 잘 알려진 1933년 은행법으로 예금보험제도가 도입되었고, 상업은행과 투자은행 간에 장벽이 생겼으며, 은행의 이자지급을 규제하는 조항(Regulation Q)도 포함하고 있었다. Q규제는 요구불(당좌)예금에 이자지급을 금하고, 정기예금과 저축예금에도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이자상한을 정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이다. 이 제도의 취지는 지방의 자금이 금융 중심지인 대도시로 역류되는 것을 막아 지방에 투자될 수 있도록 하고, 은행 간의 과당경쟁을 막아 은행의 위험감수 성향은 낮추고 수익성은 높여 건전성을 높이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자규제는 미국의 저축자들이 대안투자를 찾게 만들었고, 큰 손들은 외국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그렇게 해외에 투자된 달러화가 쌓이면서, 이 달러(Eurodollar)를 자유롭게 거래하는 런던의 금융가에는 유로시장(Euromarket)이 생겨났다. 소액투자자들의 돈은 이자규제를 받지 않는 금융상품인 MMF(money market fund)에 몰리면서 새로운 금융시장을 만들었다.
규제의 의도하지 않은 결과의 다른 사례는 이번 금융위기에서 관심의 초점이 되었던 파생금융상품의 등장배경이다. 은행의 건전성을 담보하기 위한 자기자본규제(Basel rules)는 은행들로 하여금 최상 등급(AAA)의 증권들에 대한 수요를 증가시켰고, 그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모기지 채권으로 구성된 CDOs(collateralized debt obligations) 등과 같은 파생상품들이다. 금융위기는 정부 규제를 부르고 정부 규제는 규제회피를 위한 새로운 금융기법을 만들어내는 정부와 시장 간의 숨바꼭질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투자신탁회사(mutual fund)의 주식 공매도(short sale) 규제가 그런 규제를 받지 않고 하락장에서도 수익을 낼 기회를 갖는 헤지펀드(Hedge fund)의 활성화에 기여한 것도 또 다른 규제의 의도하지 않은 결과의 사례이다. 우리가 물길을 막는다고 물이 낮은 데로 흐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돌아갈 뿐이듯이, 정부가 규제로 돈의 흐름을 막는다고 돈이 필요한 데로, 즉 수익이 높은 곳으로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규제를 피해 돌아서 가야 하기 때문에 경제비용을 높일 뿐이다.
이번의 금융위기도 예외는 아니어서 새로운 규제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정치인들은 더 이상 대마불사는 없을 것이며, 국민의 세금이 부자 은행들을 도와주는 데 쓰이지 않도록 하겠다고 큰소리치고 있다. 오는 11월 서울에서 열릴 G20 정상회의에서도 이 문제가 중요한 의제로 다루어질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역사의 교훈은 규제가 능사가 아닐 뿐만 아니라 의도하지 않은 부작용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그 부작용 중 하나가 또 다른 금융위기였음을 역사는 보여준다.
김우택 (한림대학교 명예교수, wtkim@hallym.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