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좌클릭’, 이 말은 2012년 대선을 거치며 격변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환경을 함축한 말로 기록될 것이다. 왜 여야 할 것 없이 좌클릭에 나섰는가? 명백히 급진좌파 정책인 무상급식 무상보육을 당연하게 여기고, 무상의료 같은 서구에서도 실패한 정책을 태연히 내건 이 현상은 단순히 우리 정치판의 천박함 때문인가? 아니면 민도(民度)가 아직 성숙한 민주주의를 하기에는 부족하기 때문인가? 더 나아가 사립대학까지 등록금 절반을 정부가 부담한다든가, 정부가 저소득층 부채를 탕감하겠다는 발상은 좌파의 역사가 오래된 서구에서도 놀랄만한 정책들이다. 더욱이 노조가 기업경영에 참가한다는 극단좌파 정책조차 공당의 정책에 올라있는 걸 보면 ‘대한민국의 좌클릭’이란 말이 전혀 과언이 아닌 것이다.
세계의 문명국은 모두 자본주의 체제이며 민주주의 국가이다. 오늘날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빈부격차는 자본주의 체제의 피할 수 없는 맹점이다. 우리가 공정한 거래질서를 지키고 공동체에 대한 도덕적 의무를 포함한 책임을 다하더라도 부자와 빈자(貧者)가 생기는 건 필연적이다. 시장의 자유가 재능과 노력 그리고 행운과 우연으로 부자를 만드는 반면 무능과 게으름, 불운과 우연으로 빈자를 만든다. 이 빈부격차를 줄이는 방법은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한 복지밖에 없다. 그 방법론에서 좌파는 세금을 더 거두어 국가의 개입을 늘려서 평등을 구현하고자 하고, 우파는 규제를 줄이고 자유와 창의성을 높여 성장을 통한 복지의 확산을 주장한다.
보편적 복지와 담세율
복지의 목표는 무조건적인 빈부격차를 줄이는 것이 아니다. 복지는 사회의 동력을 줄이지 않으면서 저소득층과 소외층이 위기로 내몰리는 것을 막고 그들이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사회안전망을 구축하는 일이다. 결코 모든 국민이 균등한 생활을 하는 것이 복지의 목표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좋은 복지란 저소득층을 보살피는 한편으로 그들에게 교육과 일자리를 포함한 기회를 균등하게 제공하여 차상위층 나아가 중산층으로 오르는 사다리를 놓는 일이다. 복지는 단순히 시혜가 아니라 시민의 권리이지만, 그것은 빈곤의 영속화를 만드는 장치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런 탈빈곤의 복지, 즉 빈곤층을 줄이고 중산층을 늘려가는 복지가 바로 생산적 복지다. 갈등이 가장 적은 형태인 항아리 구조의 사회로 가는 길인 것이다. 그런데 흔히 말하는 ‘보편적 복지’는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에게 균질한 생활을 제공하는 것이다. 무상급식과 무상보육은 빈자든 부자든 똑같은 서비스를 제공해 계층 간 위화감을 줄이고 소위 ‘낙인효과’를 없앤다. 대신 방대한 정부를 만들고 담세율을 높여 가처분 소득을 줄인다. 무엇보다도 복지의 품질을 낮추고 정부에 기대는 복지수요를 늘여서 하향평준화된 무기력한 사회를 만든다. 심하게 말하자면 자기가 낸 세금으로 원하지 않는 배급을 받는 것과 같다. 이런 보편적 복지가 서구에서 한때 세를 얻은 것은 포퓰리즘에 의존한 정치인들 탓이다. 대중에게 뭔가를 주겠다는 정책은 표를 얻는 데는 너무 효과적이어서 정치인에게는 피할 수 없는 유혹이다. 이런 유혹에 지금 우리 정치도 빠져 있는 것이다.
이런 보편적 복지는 엄청난 재원을 필요로 한다. 그 돈은 우리 세금이거나, 우리가 갚아야 할 빚이다. 우리가 현재의 복지를 위해서 그리스 같이 빚을 내어 후손에게 부담을 줄 수는 없다. 그래서 재원은 한정되어 있다. 우리 국민총생산은 세계 15위지만 일인당 국민소득은 세계 40위권에 불과하다. 아직은 서구 같은 부자가 아니라는 얘기다. 거기다 소득세를 내는 사람의 비율은 50% 정도다. 이 국민소득으로는 간접세를 늘릴 여지도 없다. 일부에서는 부자에게 세금을 더 걷어야 한다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다. 이미 우리는 상위 10%가 전체 소득세의 80%를 감당한다. 근로소득세만 보면 상위 10%가 68%를 감당하고 법인세의 경우 상위1%가 86%를 내고 있다. 그래서 설사 부자에게 더 걷는다 해도 그 액수는 제한적인 것이다.
결국 담세율을 올려야 하지만 이건 더 어렵다. 복지 선진국은 일인당 국민소득이 대개 4만 달러 이상인데 아직 우리는 2만 달러를 조금 넘는 수준이다. 선진국의 담세율은 이탈리아 30%, 프랑스 27.5%, 독일 21.5%, 미국 18.6%, 일본 15.8%이며 우리는 20% 정도다. 우리 담세율엔 소득재분배 기능을 맡고 있는 건강보험 국민연금 등이 빠져 있다. 이 준조세 4대 보험을 더하면 담세율은 25% 정도로 치솟는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슨 방법이 있는 것일까? 불필요한 지출을 줄이고 세금을 아끼자는 건 말은 쉽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의 예산구조는 왜곡돼 있다는 지적을 받는다. 대선 공약이 반영되지 않은 내년도 복지예산이 95조 원에 이르지만 국방예산은 불과 35조 정도다. 자주국방을 운위하기에는 터무니없이 적은 금액인 것이다.
재원논의 없이 남발되는 선심성 복지정책은 포퓰리즘
재원을 확보할 별다른 대책 없이 보편적 복지를 주장하는 정치세력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이런 문제보다 더 염려스러운 것은 우리는 장래가 불투명한 빚쟁이라는 사실이다. 바로 재정건전성이라는 함정이다. 문민정부마다 거의 두 배씩 늘어온 국가부채는 지금 460조다. 게다가 정부가 보증한 공기업 부채와 지자체 빚을 합하면 빚은 무려 1,800조나 된다. 이는 G7 국가이자 빚 때문에 허덕이는 이탈리아의 절반 정도다. 앞으로 고령화가 본격화되면 복지비용이 늘어 국가부채는 더 증가한다. 올해부터 균형재정을 한다 해도 노인인구가 34.2%까지 느는 2050년엔 이자부담만 국민총생산의 6.2%가 된다. 균형재정이 2016년으로 늦춰지면 2050년엔 국가부채는 213%까지 늘어 국가신용등급은 투기등급으로 전락한다.
사정이 이런데도 우리 정치판은 선심성 복지정책을 멈추지 않는다. 보수주의 진보주의 갈등을 떠나 가능하지 않은 복지를 외치는 건 그 자체로 포퓰리즘이라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 오늘 우리가 안고 있는 저소득층의 문제는 심각하다. 그러나 그 해결책으로 우리 사회를 보편적 복지 같은 급진좌파 정책을 펴는 건 옳지 않다. 그 결과가 너무 파괴적이고 회복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저소득층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은 좋은 일자리를 늘리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선은 달콤한 선심성 정책에 쓸 돈으로 투자를 늘리고 빚을 갚아야 한다. 그래야 사회의 창의성을 줄이지 않고 저소득층을 줄일 수 있다. 복지는 꼭 필요한 곳부터 분수에 맞게 순차적으로 해야 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좌클릭, 오늘의 이 현상은 우리 스스로 파는 무덤이다.
전원책 (자유경제원 원장,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