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서비스 선진화라는 주제를 둘러싸고 영리의료법인 도입 등이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 우리가 의료서비스 선진화를 위해 벤치마킹하려고 하는 대표적인 선진국의 의료서비스 체계는 유럽의 공공부문 주도형(정부 공급형, 공공계약형)과 미국의 민간부문 주도형이다.
두 가지 의료서비스 체계: 공공부문 주도형과 민간부문 주도형
의료서비스 체계를 의료비 지출을 기준으로 볼 때, 대체로 공적으로 조달되면 공공부문 주도형, 민간재원 조달 비중이 크면 민간부문 주도형이다.1) 공공부문 주도형에서는 의료비용 대부분이 다른 사람들의 재원으로 지불되어 그렇지 않을 때에 비해 의료서비스에 대한 수요가 크게 늘고 의료 과소비와 의료비의 증가가 나타난다. 그 결과 의료 이외 교육ㆍ주거ㆍ생필품ㆍ문화 부문의 생산과 소비에 투입되는 자원이 감소하고 소비자후생도 하락한다.2)
의료 과소비는 재정적자를 초래하고 이에 따라 공공부문 주도형 국가들은 의료서비스 공급자에 대한 각종 규제와 수요자에 대한 서비스 이용제한(rationing)을 통해 의료비 상승을 통제하고자 노력하지만 기득권자들로부터 강한 저항에 직면한다.3)
민간부문 주도형인 미국의 의료보험시장은 민간보험의 비중이 67.4%로 공적의료보장의 비중 29.0%보다 훨씬 더 크다. 민간보험시장에서는 고용자 지원 건강보험이 압도적으로 큰 비중(86.8%)을 차지하며, 4천만 명 이상의 무보험자들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4) 물론 정부는 세금으로 65세 이상 노령인구(장애인 포함)에 대해서는 메디케어(Medicare)를, 저소득층(임산부 포함)에 대해서는 메디케이드(Medicaid)를 제공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미국 의료서비스시장에 대해 보다 자세히 살펴봄으로써 우리 의료서비스 선진화의 방향에 대한 시사점을 찾고자 한다.
미국 의료서비스시장의 특징
미국의 1인당 의료비 지출수준은 전 세계에서 가장 높으나 평균수명은 그렇지 못하다. 유럽형인 영국과 비교해 볼 때, OECD 보건통계 기준으로 2007년 미국의 1인당 의료비는 6,401달러로 영국의 2,724달러보다 훨씬 높지만 평균수명은 77.8세로 영국의 79.0세에 비해 낮다.5) 사실 평균수명은 의료비 지출수준과 직접 연관되어 있다고 보기 어려운 측면도 있지만 미국의 경우 의료 과소비에 비해 그 성과는 그렇게 만족스럽지 않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의료서비스를 수익 경쟁을 하는 곳으로 삼지 말고 국영화하거나 공공의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의료분야에서 특별히 수익성 추구가 금지되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6) 그리고 미국의 의료서비스시장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실패한 것은 자유시장이 아니라 정부 간섭임을 알게 된다. 미국의 민간보험시장에서 정부간섭이 또 다른 간섭을 불러온 결과 엉뚱하게도 공공부문에서나 볼 수 있는 소위 ‘제3자 지불의 문제(3rd party payment problem)’가 나타났던 것이다. 미국에서 의료서비스에 대한 불만이 커진 원인은 자유보험시장이 실패했기 때문이 아니라 환자가 사용하는 의료서비스 1달러 중 76센트는 환자가 아닌 다른 제3자(정부ㆍ보험회사ㆍ고용주)가 지불한다는 데 있다는 것이다.7)
경쟁적인 민간보험시장이라면 제3자 지불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미국의 민간보험에서 바로 이런 일이 벌어져 사람들이 자유로운 시장에서와는 전혀 다른 유인(incentive) 구조를 가지게 된 것일까? 미국의 민간보험시장은 정부 간섭이 더 많은 간섭을 부른 전형적 사례로서 그 메커니즘은 다음과 같다.
연방정부는 제2차 세계대전 중 화폐 증발에 따른 대규모 인플레이션을 감추기 위해 임금-가격 통제를 실시하였다. 기업들은 이 임금 통제를 회피하면서 유능한 인재를 고용하기 위해 임금 대신 건강보험을 제시하게 되었으며 이는 기업들의 보편적 관행이 되었다. 의회는 이 건강보험에 대해 과세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이제 피용자들은 고용주가 보험을 지불해 주었으므로 의료비용에 무관심해지고 의료소비를 늘리게 되어 의료비용은 계속 높아졌다.8) 이에 보험회사들과 고용주 측은 비용통제에 나서게 되었는데 선거에서 표를 의식한 정치가들이 주도해 의료보험의 커버리지가 더 확대되도록 강제하는 정부 규제를 도입하였으며 이는 피용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이런 과정을 거쳐 미국의 의료서비스 체계는 공적 의료보장부문에서 뿐만 아니라 민간보험시장에서도 ‘제3자 지불문제’라는 잘못된 유인구조가 광범위하게 자리잡게 되었다. 이것이 미국에서 의료서비스의 가격과 의료비 지출이 급증하게 된 근본적 이유이다.9)
우리에게 주는 교훈
이처럼 미국 의료서비스시장의 실패는 시장의 잘못이 아니라 정부의 간섭에서 비롯되었다. 요약컨대 미국의 사례에서 보듯 의료선진화 논의에서 우리는 왜 미국 민간보험시장에서 사람들의 유인구조가 제3자 지불문제가 만연하는 공공부문과 다름없게 되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토대로 우리는 미국 민간보험시장의 문제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게 되고, 이 문제가 공공통제를 강화한다고 해결될 수 없는 성질의 것임을 깨달을 수 있다.
미국의 사례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먼저 하나의 간섭이 엉뚱한 곳의 간섭과 왜곡을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이며, 둘째로 성과가 불분명한 미국의 의료과소비는 의료에 대한 공공통제의 강화가 아니라 자유시장을 장려해야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김이석 (한국경제연구원 초빙연구위원, kimyisok@keri.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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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윤희숙ㆍ고영선,『의료서비스 산업 선진화를 위한 제도개선 과제』, 한국개발연구원 연구보고서, 2009.
2) 각자의 후생(효용)은 교육, 의료 등에 쓰인 마지막 1원의 가치가 같을 때 극대화되지만, 의료부문에서 다른 사
람이 대신 지불해 주면 후생(효용)을 극대화하는 수준보다 의료소비가 많아지기 때문이다.
3) 의료비 급증의 근본적 원인은 고가 장비를 쓰는 진료(예를 들어 MRI 검사) 때문이 아니라 이를 가능하게 하는
제3자 지불에 따른 수요의 급증에 있다. 이에 대해서는 Murry Rothbard, "Government Medical 'Insurance'"
in Making Economic Sense, Mises Institute 참고.
4) 최병호ㆍ이근정,『미국 의료개혁의 정치경제학』, 보건경제정책학회 2010 경제학공동학술대회 발표자료.
5) 한국의 경우 2007년에 1인당 의료비는 1,318달러, 평균 수명은 78.5세이다.
6) 의료 분야에서 수익 추구를 죄악시할 이유는 없다. 생명의 유지에 필수적인 식품도 가격기능과 이윤 동기에
의해 공급될 경우에 식량배급제에 의해 공급될 때보다 더 잘 공급되고 있으며, 정신적 건강에 필수적인 문화
상품인 서적도 이윤 동기에 의해 잘 공급되고 있다. 이와 관련해 김이석,『경제계산논쟁, 발견과정으로서의
경쟁에 비춰본 의료정책』, 한국하이에크소사이어티 편,『이제는 자유를 말할 때』, 율곡출판사, 2001, 참고.
7) 보아즈(강위석 외 역),『자유주의로의 초대』, 북코리아, 2009, p.355 참고.
8) 1965년 환자들은 병원비용의 17%, 1997년에는 5% 정도를 본인이 부담한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보아즈,
『자유주의로의 초대』, 북코리아, 2009, pp.356-357 참고.
9) 이에 대응하여 미국 정부는 의료서비스의 가격과 유형 및 수량을 규제하여 의료비 상승을 통제하였다. 그러나
보편적 의료수혜권을 인정한 상태에서 이런 비용통제는 응급실 폐쇄와 환자 덤핑이라는 문제를 야기하였다.
이에 관해서는 엡스타인,『공공의료제도의 치명적 위험』, 그리고 GAO, Trauma Care: Lifesaving System
Threatened by Unreimbursed Costs and Other Factors, 1991. May. GAO/HRD-91-57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