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두언 국희의원에 의해 제기된 외국어고등학교의 폐지 논란은 최근 세종시 논란에 묻혀 잠시 잠잠해졌다. 정 의원과 외고 관계자들과의 기싸움에서 누가 이길지는 짐작하기 어렵다. 어쩌면 이 문제는 지리멸렬하게 한 해를 넘길지도 모르고 다시 잊힐지도 모른다. 교육은 모든 이에게 관련된 그리고 관련될 주제이기 때문에, 교육 관련 정책은 어떤 경우에도 민감한 문제로 다가온다. 그래서 교육개혁이라는 거창한 포장으로 매번 다가서는 교육제도의 변경 시도는 시대적 현안이 되며, 교육 관련 생산자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치열한 난투극을 전개한다. 그렇지만 이 땅의 많은 학생과 학부모들은 대체로 이를 담담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한국의 교육제도는 1970년대 초 유신정권의 중고교 평준화 실시로 근본적으로 바뀌게 된다. 그 후 수많은 교육제도가 정권의 부침과 함께 이어졌다. 화려한 취지와 함께 등장한 이들 교육개혁들의 결말은 항상 새로운 교육 문제를 낳았고 그것을 개선하기 위해 등장한 교육개혁 역시 또 다른 문제를 만들어낼 뿐이었다. 내로라하는 교육자들의 백가쟁명의 무수한 해결책 제시와 시도에도 불구하고 교육현장은 단지 또 다른 하나의 실험장이 되어버리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제도의 연결고리가 일관되게 서로 잘 맞물려 있지 않은 탓이다.
만연되어 있는 명문대 콤플렉스
한 번 생각해 보자. 제 자식이 사회에 나가 든든한 직장을 잡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지 않을 부모들이 어디 있는가? 그렇다고 해서 제 자식이 온 세상을 움켜질 정도의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을 가지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단지 처자식을 먹여 살리고 자신의 앞가림을 해주기를 바랄 뿐이다. 부모들은 이를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잘 안다. 사회는 소위 우리가 말하는 몇몇 명문대 출신을 선호한다. 그래서 제 자식이 책가방을 매기 시작하는 유치원 때부터 부모들의 목표는 확고하다. 그것은 제 자식을 명문대에 보내는 것이다. 이 땅의 모든 부모들은 이 목표에 자신이 가진 모든 것, 시간과 돈 그들의 삶 자체를 바친다. 매년 명문대 입학생은 고작 2~3만 명에 불과한데 말이다.
부모들은 자식들이 가져오는 성적표에 매번 실망하면서도 명문대에 입학시키겠다는 ‘희망의 끈’을 결코 놓지 않는다. “중학교에 가면 잘하겠지”, “고등학교 가면 잘하겠지” 하면서 말이다. 그 꿈을 접는 것이 대체로 고등학교 2학년 1학기 마칠 때쯤이다. 매년 50만 명이 넘는 이 땅의 모든 학생과 이들 부모들이 10년 넘게 명문대라는 똑같은 목표를 향해 모든 열정을 고스란히 바치게 하고 질곡 속으로 내모는 것이다. 얼마나 어리석고 슬픈 현실인가? 이 슬픈 현실을 곧바로 벗어나게 하는 방법은 명문대를 그리고 명문 대기업을 없애 버리는 것이다. 중고등학교 선발과 같이 대학교도 추첨으로 학생들을 배분하면 된다. 중고등학교는 그렇게 하는 데 왜 대학교라고 그렇게 할 수 없겠는가? 그러고 나서 국가가 다시 강권에 의해 대학 졸업생들을 산업현장에 배분하는 것이다. 얼토당토않은 소리라고 일축하겠지만, 많은 국민들이 큰 형처럼 생각하는 국가가 모든 학생들의 자질과 능력을 제대로 판단할 수 있다면 못할 일도 아니다.
그 누구도 필자의 이런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차피 좁은 문이고 그들 중 대다수가 결국에는 낙망(落望)할 수밖에 없다면, 이를 지혜롭게 해쳐나갈 수 있는 여러 기회를 좀 더 일찍이 주는 것이 국가의 현명한 처사이다. 직업 선택과 직원 채용의 자율권이 헌법으로 보장되어 있는 한, 여기에 이르는 과정에서도 그 자율권을 국민에게 주는 것이 이 사회의 모두를 위하는 길이다. 중고등학교 입시가 사라지고 평준화가 강화된 지금, 이 땅에 변변한 상업고등학교와 공업고등학교가 모두 사라진 것을 보아라. 얼마나 사회가 단순화 그리고 삭막하게 되었는가? 모두가 명문대라는 하나의 꿈을 나이가 20살 가까이 될 때까지 똑같이 꾸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교육 평준화제도는 다양성을 부정하는 나쁜 제도
인간은 서로 다르게 태어난다고 한다. 그리고 그 다양함을 수용하는 사회가 건강하고 역동적인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얼마 전 이명박 대통령도 이를 꽃밭에 비유한 적이 있다. 이렇게 말로만 거창하게 할 것이 아니라 실제로도 다양함을 수용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 위정자들의 양심어린 책무이다. 우리 사회가 그 다양함을 담을 수 있는 출발점이 바로 학생과 학부모에게 학교 선택권을 주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명문대를 향한 질곡을 조금 더 일찍이 벗어나게 하고 이에 덧없이 쏟아 붓는 시간과 돈, 이 모든 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우리 사회도 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싹이 자연적으로 곳곳에서 움틀 것이다.
혹자는 이렇게도 반론할 것이다. “대부분의 선진국에서도 우리처럼 하고 있지 않는가”라고. 필자의 독일 유학 경험에 비추어 보면, 독일 학부모들은 그들의 자식이 중학교 들어갈 무렵 학교 담임교사의 권유에 따라 자식들의 진로를 선택하게 한다. 담임교사가 단순한 실기 교육에 중점을 두는 주요 학교(Hauptschule)에 가는 것이 어떻겠느냐 하더라도 말이다.1) 만약 우리의 경우 그 어린 나이에 제 자식을 실기 중심 학교에 보내라고 한다면 대개 부모들은 펄쩍 뛸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선비 문화에 익숙한 우리의 정서적인 탓도 있겠지만, 모든 학부모와 학생들이 똑같이 명문대라는 한 방향의 꿈을 갖게 한 지난 40여 년 동안의 평준화 제도에 크게 기인한다. 평준화 제도야말로 서로 다르게 태어나는 사람들이 각자의 다양성을 스스로 찾지 못하게 만드는 지극히 나쁜 제도이다.
모든 고등학교에도 동일한 선발권을 주어야
중학교 진학을 위한 초등학교 학생들의 경쟁에 내몰리는 모습이 너무도 애처롭다면, 최소한 모든 고등학교에 학생 선발권을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 지금의 중학생들이 고등학교 입시가 없다 하여 평준화 주장을 외치는 교육자들이 바라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이들은 여전히 밤늦게까지 책상 앞에 앉아 있지 않는가? 단지 고등학교에서 조금 더 먼 대학교 입시를 위해서 말이다. 그래서 고등학교 입시 제도를 부활한다고 해서 학생들이 시달리는 정도가 지금보다 더 심해질 것이라고 여길 근거는 없다. 학생과 학부모들에게 보다 다양한 길을 보다 이른 시점에서 선택하게 해주는 것이 우리의 사회가 사시사철 각양각색의 꽃으로 가득한 꽃밭으로 나아가게 하는 길이다. 지금처럼 특목고에만 학생 선발권을 주는 것도 그다지 좋은 제도는 아니다.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이기 때문이다. 규칙은 누구에게도 무차별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는 점에 비추어 보더라도 모든 고등학교에 학생 선발권을 주는 것이 정의로우며, 학교 간의 경쟁을 부추겨 공교육 정상화와 내실화에 이르는 길이기도 하다. 지금의 평준화 틀에서 이렇게 저렇게 해보는 모든 교육정책은 백년하청일 뿐이다.
배진영 (인제대학교 국제경상학부 교수, econbjy@inje.ac.kr)
---------------------------------------------------------------------------------------------------1) 독일에서는 6세부터 17세까지 12년간이 의무교육이다. 기초학교(보통 6세에 입학하여 4~6년을 다닌다)를 마
치고 나면 대체로 적성에 맞게 주요 학교, 실업학교, 인문학교로 진학한다. 보통 교육을 실시하는 주요 학교
에서는 대학 진학을 목표로 하지 않는 학교로, 졸업 후 직업생활에 기초가 되는 내용을 교육하며, 직업교육
을 받을 때 도움이 되도록 한 가지의 외국어(대개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 졸업 시험은 없으며, 이후 직업 전
문학교에의 입학이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