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도 예산안이 발표되면서 주요 일간지의 톱기사가 “복지예산 확대” 일색이었던 것이 생각난다. 이전 정권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현 정부 출범 후에도 복지지출은 계속 빠르게 늘어나서 복지관련 지출의 총예산 대비 비율은 최근 수년간에도 계속 신기록을 경신하고 있다. 이처럼 복지관련 지출이 빠르게 늘어나는 것은 물론 우리의 경제여건이 그 만큼 좋아졌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정치적인 부분도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명분상으로는 선진국들에 비해 우리나라는 복지여건이 매우 열악하기 때문에 선진국이라고 할 수 없는 상황이며, 그것은 복지예산의 상대적 규모가 매우 작다는 사실로 증명이 된다는 주장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본다. 이러한 상황이기 때문에 될 수 있는 대로 복지지출을 빠르게 확대해야 선진국을 따라갈 수 있다는 주장이 정치적으로 설득력을 얻게 된 것 같다. 많은 국민들이 어떻게 이런 생각을 갖게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단순한 비교수치를 들이대고 이러한 주장을 한다면 아마 대부분의 국민들은 설득당할 것이라고 본다. 총예산 대비 복지지출의 비율은 OECD 국가들의 평균치에 비해 우리나라의 수치가 매우 낮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명목적 수치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나라는 복지예산 확대를 서두를 때가 아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서둘러야 한다는 근거로 제시되고 있는 복지지출의 비중이 선진국들에 비해 결코 낮은 수준이 아니라는 점이고, 두 번째 이유는 서둘러서 복지예산을 확대하는 것이 단기적으로나 중장기적으로 심각한 문제들을 야기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점이다. 첫 번째 이유를 간단히 살펴보고, 서둘러 복지예산을 확대할 때 생길 수 있는 문제들은 다음 단락에서 논의한다.
국회 예산정책처에서 최근에 발표된 한 연구보고서에 의하면 우리나라 정부가 발표한 복지관련 지출통계는 상당히 과소계상되고 있다는 것이다.1) 분류의 오류 등을 조정하여 수정한 복지관련 지출 비중(전체 정부 지출규모 대비)은 OECD 회원국 평균 비율의 74% 수준이라고 이 보고서는 주장하고 있다. OECD 평균의 74%라도 단순히 비교하면 현저히 낮은 수준이라는 것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복지지출에 영향을 주는 다른 지표들을 함께 고려해서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앞에서 인용한 보고서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노인인구 비중은 OECD 평균의 71% 수준이고 연금지출 비중은 22% 수준이라는 것이다. 구매력지수로 조정한 1인당 GDP의 수준은 OECD 평균의 76%라고 한다. 소득수준 등을 기준으로 생각한다면 현재의 수준이 크게 낮지도 않고 높지도 않은 수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복지지출에 더 중요한 영향을 주는 변수들은 고령화의 정도와 연금제도의 성숙도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고령화는 빠르게 진행되고 있지만 아직은 OECD 국가들에 비해 상당히 젊은 인구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OECD 국가와 같은 복지제도를 시행하고 있어도 재정수요는 OECD보다 훨씬 작을 수밖에 없다고 할 수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연금지출 비중이다. 우리나라의 기본연금인 국민연금은 1988년에 출범하여 이제 겨우 20년을 조금 넘긴 상황이기 때문에 성숙기에 들어간 선진국들에 비하여 아직 지출이 5분의 1 수준에 불과한 것이다. 연금의 성숙과 고령화의 진행이 동시에 일어나고 있는 점을 감안할 때 앞으로 20~30년이 지나면, 그동안 새로운 복지제도의 도입이 전혀 없어도, 우리나라의 복지관련 지출비중은 선진국 수준을 능가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나라의 현재의 복지제도는 선진국에 비해 손색이 없는 구색을 갖추고 있으며 따라서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거나 복지예산의 증액을 서두를 상황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서두를 때의 문제들은 너무 뚜렷하다. 우선 급하게 하다보면 여러 가지 시행착오가 따르게 되고 이것들이 자연스럽게 예산의 낭비로 이어진다. 충분한 연구와 준비 없이 제도부터 시행하는 경우가 많이 생기게 되고 그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낭비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복지제도는 다른 어떤 정책보다도 높은 신뢰를 요구한다. 신뢰가 깨지면 많은 예산을 사용하면서도 오히려 불평과 불만을 유발하게 된다. 수급 대상자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일인데 정부가 우왕좌왕하면서 불확실성을 높이게 되면 정책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는 것은 당연하며 국민들의 불만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복지와 관련한 불만이 커지면 정치권은 다시 불만세력에 대한 예산확대로 대응하는 것이 보통이다. 서둘러 늘리는 복지예산은 자기팽창적인 특성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복지관련 지출은 거의 90%가 의무지출로 구성되어 있다. 개별 법률에 의해서 지출이 정해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지출의 변경이나 조정은 법률의 개폐절차를 밟아야 가능하다. 복지의 수급이 기득권화되면서 쉽게 정치 세력화하는 경향이 나타나기 때문에 관련 법률의 변경은 정치적으로 매우 어려워질 수 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처음에 도입할 때부터 신중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충분한 시간을 두고 예상되는 효과나 문제점들, 특별히 재정건전성이나 경제에 미치는 영향 등을 철저하게 따져보고 먼저 경험했던 나라들의 경험도 꼼꼼히 살펴본 뒤에 도입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개별 법률로 지출이 결정된다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의 가능성도 내포한다. 제도를 서둘러 도입하면서 다른 제도들과의 정합성을 충분히 따지지 않는 경우가 쉽게 발생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중복 혹은 과잉 지원이나 사각지대 같은 허점들이 발생할 여지가 커진다. 이러한 과정에서 수평적 불공평이 발생하여 불만이 커지는 현상도 흔히 나타날 수 있다.
복지예산을 서둘러 확대하는 것의 가장 큰 문제점은 성장베이스의 잠식이라고 본다. 이것은 미래 복지 기반의 축소 또는 붕괴를 의미할 수 있다. 지금 아무리 좋은 복지제도를 도입해도 성장기반이 무너지면 그 제도는 지속될 수 없다. 성급한 복지확대가 성장기반을 훼손할 우려가 있다는 것은 기우(杞憂)가 아니다. 일찍이 복지에 힘을 쏟은 유럽 선진국들의 성장잠재력 둔화와 경제 활력 저하는 너무 잘 알려진 사실이고, 최근에는 여러 나라에서 복지개혁을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모습까지 나타나고 있다.
복지지출의 성급한 확대가 성장잠재력을 저하시키는 경로는 다양하다. 무엇보다도 복지재정 확대는 궁극적으로 조세부담의 증가를 가져오게 되는데 높은 조세부담은 불가피하게 성장의 둔화를 가져온다. 특히 세계화된 상황에서 조세가 초래하는 자원배분의 왜곡은 경제에 치명적인 영향을 준다.
한편, 우리나라의 급속한 고령화는 이 같은 문제를 더욱 악화시킬 수 있다. 고령화 자체가 성장잠재력 저하의 중요한 요인이 되는데 복지지출 확대가 먼저 이루어지면 성장잠재력은 더욱 급속하게 하락하게 된다. 성장의 둔화가 절대빈곤 인구 비율의 증가를 가져온다는 것은 경제학에서 실증적으로 증명된 사실이다. 빈곤의 확대는 복지수요의 증가를 의미하는 것이고, 이러한 복지수요의 증가로 재정이 악화되면 다시 성장하락을 가속시키는 악순환이 나타나게 된다.
우리에게는 중요한 약점이 한 가지 더 있다. 우리 경제는 선진국에 비해 구조적인 취약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경제는 인적자원 중심의 경제이고 아직도 공산품의 수출을 통한 부가가치의 생산에 상대적으로 더 많이 의존하고 있다. 부의 축적 면에서 선진국으로서의 긴 역사를 가지고 있는 유럽의 국가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아직도 이를 악물고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선진국을 따라가기 어려운 경제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세금부담의 증가나 넉넉한 복지 혜택은 모두 열심히 일하려는 의욕을 저하시킨다는 점에서 인적자원 중심 경제에게는 더 큰 부담이 될 수 있다.
요컨대 우리는 아직 유럽 선진국 수준의 복지를 이야기할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다. 먼저 해야 할 일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미 이러한 길로 꽤 깊숙이 들어와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지만 선후를 뒤바꿔 성급하게 복지제도를 확충하고 예산부터 확대하다가는 낭패를 당하기 십상이다. 우리가 무엇보다도 먼저 힘써야 할 일은 세입기반 확충이다. 견실한 성장잠재력을 길러 경제에 무리를 주지 않으면서도 충분한 세수를 확보할 수 있는 기초체력을 마련하는 일이 우선되어야 한다. 어느 정도 체력을 다진 다음에 조심스럽게 복지의 확대를 모색하기 시작해야 할 것이다.
복지확대를 시작할 단계에서도 먼저 결정해야 할 것은 어떤 철학에 바탕을 두어 어떤 모형의 복지사회를 건설할 것인가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 문제를 깊이 연구하고 논의하여 사회적인 합의에까지 이르게 하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모형을 구체화하고 또 그것을 실현시키는 전략과 방안들이 마련되어야 한다. 여기저기서 그럴듯한 조각들을 가져다가 어지럽게 늘어놓으면 정말 바로잡기 힘들어질 수 있다. 복지제도는 여러 그룹들의 이해가 걸린 문제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절제와 조화가 강조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새로운 복지제도의 도입보다도 복지 인프라 구축에 우선적으로 힘을 쏟아야 한다. 전문 인력의 확보, 민관의 복지 네트워크 정비, 지방정부와 중앙정부의 합리적 역할 분담체제 확립 등 복지 시스템이 제대로 운영되게 하기 위해서 먼저 해야 할 일들이 산적해 있다.
복지는 1960~1970년대의 경제개발처럼 저돌적으로 밀어붙여서 될 일이 아니다. 신중하고 섬세한 접근이 필요한 분야이다. 이렇게 접근하는 것이 더딘 것 같아도 나중에 보면 더 빠른 길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아무리 완벽한 제도를 도입해 놓아도 그것이 운영되는데 필요한 재원이 확보되지 못한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곽태원 (서강대학교 경제학과 명예교수, pwkwack@sog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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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인화, 『복지재정 운용실태와 정책과제』, 국회예산정책처,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