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나라가 번영하고 어떤 경제정책이 성공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한 나라의 경제가 번영하기 위해서는 이를 위한 경제체제의 기본 틀이 제대로 마련되어야 하고 경제정책이 성공하려면 이를 담보하는 조건들이 충족되어야 한다.
지도자들은 자주 자신들이 “경제를 살리겠다”고 약속하고 온갖 정책을 남발한다. 한 가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은 경제가 지도자에 의해 인위적으로 살아나는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지도자들의 인위적 조치로 경제가 살아날 수 있다면 지구상에 못 사는 나라가 없어야 하지 않는가? 지구상 200여 개국 중에서 국민소득이 7만 달러인 나라가 있는 반면 왜 일부 나라는 아직도 700달러 수준인가? 안타까운 사실은 아무리 훌륭한 지도자라 하더라도 경제를 쉽사리 살리지는 못하지만 잘못된 지도자와 정책이 경제를 망치기는 쉽다는 것이다.
통상적으로 무슨 일이 생기면 우리는 임기응변적으로 정부에게 반드시 무언가를 빨리 하기를 촉구한다. 항상 정부가 무엇을 해야만 하는 식으로 생각하는데, 무엇을 반드시 해야 하는 식으로 생각하면 세상의 모든 일은 정부가 하는 것이 좋다는 결론이 쉽게 도출된다. 정부는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를 살피고 이를 제대로 실천하는 것이 필요하다. 민간 또는 시장이 잘할 수 있는 일들에 정부는 개입하지 말아야 하며 더더욱 국민세금을 투입해 낭비를 초래해서는 안 된다.
잠재적 생산성이 높은 곳을 찾아내어 자원을 집중적으로 배분하는 일은 시장이 할 일이지 정부가 할 일이 아니다. 교육ㆍ문화ㆍ예술ㆍ산업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이러저러한 이유를 대면서 예산이 집중적으로 지원되고 있다. 정부가 마련한 기준에 따라 예산지원을 받기 위해 경쟁을 장려하는 것은 시장논리의 잘못된 적용이다. 정부의 집중 지원으로 우리가 손에 쥐는 것은 높은 품질이나 낮은 가격이 아니라 충성이나 허위보고의 경쟁일 뿐이며, 이 과정에서는 자원 자체가 낭비되는 것은 물론 귀중한 자원인 창의력도 소멸된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 위에 100달러짜리 지폐가 떨어져 있다. 100달러짜리 지폐를 발견하는 경제학자는 과연 어떻게 행동할까? 이미 세상을 떠난 올슨(Mancur L. Olson) 교수는 ‘경제학자는 그 지폐를 힘들여 줍는 수고를 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왜 일까? 만약 그 지폐가 가짜가 아니고 진짜였다면 다른 보행인이 벌써 주워 챙겼을 것이기 때문이다.
왜 후진국들이나 선진국들이 길에 나뒹굴고 있는 100달러 지폐를 그대로 방치할까? 즉 모든 정보와 기술이 잘 알려져 있고 대가만 지불하면 얼마든지 입수가 가능한 현실에서 선진국과 후진국 간의 소득격차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해소되는 것이 당연한데 왜 현실에선 그 격차가 계속 확대되는가, 그리고 그렇게 고상하고 그럴듯한 정책들이 널려 있는데 왜 선진국들이 이러한 정책들로 자신들의 경제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느냐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후진국 빈곤의 근본적 원인이 무엇인가?” 또는 “선후진국 간에 왜 소득격차가 발생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통상적으로 부존자원의 격차 특히, 인적자원의 차이 또는 기술격차로 설명되어 왔다. 이 통상적인 설명은 옳지 않다. 만약 통상적 설명이 옳다면 길거리에 떨어져 있는 고액권(高額券)을 주워, 즉 이 경우 세계 최고의 기술을 도입ㆍ활용하여 후진국이 빈곤에서 벗어나거나 선진국을 쉽게 따라잡아야 하는 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지도자나 정부의 인위적 조치가 경제를 살릴 수 없고 나라의 번영에 대한 통상적 설명이 옳지 않다면 도대체 누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한 마디로 정부의 역할이 바뀌어야 하고 그 방향은 정부 확장적이 아니고 시장 확장적이어야 한다. 이때 정부의 역할은 길거리에 버려진 고액권을 직접 집는 것이 아니라 적정한 제도와 정책을 통해 민간이 고액권을 집는 능력을 향상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지금까지 많은 학자들의 논의는 정부가 문제를 야기하는 존재인지 또는 정부가 문제를 해결하는 존재인지에 초점을 맞춰 왔다. 이제는 논의의 초점을 어떤 유형의 정부가 그리고 어떤 유형의 제도가 경제 번영을 유도ㆍ촉진하느냐에 맞춰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제기되는 두 가지 보다 구체적인 질문은 첫째 경제번영을 촉진하기 위해 정부는 어떤 유형의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가이고, 둘째 어떤 유형의 정부가 이들 서비스를 보다 일관성 있게 제공하는가이다.
경제적 번영을 위해 어떤 유형의 정부가 필요한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을 잘 나타내는 문구는 앞서 언급한 올슨 교수에 의해 제안되었다. 그것은 ‘시장 확장적 정부(market augmenting government)’이다. 시장 확장적 정부는 “사유재산권을 창출하고 보호하는 그리고 계약이행을 보증할 만큼 강력하나 자체의 활동으로 이들 권리를 빼앗지 않도록 제약되는 정부”이다. 시장 확장적 체제를 어떻게 확립하느냐 하는 문제는 많은 과제들을 안고 있는데, 이에는 3권 분립에서의 국회와 법원의 견제와 균형, 정부의 재정활동에 대한 엄격한 제한, 교육을 통한 정보에의 원활한 접근 등이 포함된다.
작은 규모의 예산을 가진 나라가 자원관리를 효율적으로 했으며 작은 정부는 국가의 생산성을 저하시킨 경우는 없다. 그러나 국가예산이 방대하고 민간부문에 원칙 없이 적극 개입하는 큰 나라는 언제나 곧장 난관에 봉착한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현실의 불가피성에 초점을 맞추어 이 사업 저 사업 벌리기보다는, 지금은 다소 고통스럽더라도 예산규모를 상당히 줄이는 것이 국가 백년대계의 시금석을 놓는 길이다.
한 나라의 경제가 번창하기 위해서 마련되어야 하는 경제체제의 기본 틀 속에 포함되어야 하는 내용은 매우 다양하고 많다. 그 중 핵심적이라고 판단되는 것은 사유재산권의 확립, 교환 및 거래의 보장, 경쟁적 시장체계의 구축, 효율적 자본시장의 구축, 통화가치의 안정, 효율적이고 공평한 세제의 구축, 그리고 대외개방과 자유무역의 창달 등의 일곱 가지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외견상으로 보면 이들 일곱 가지 기본 틀이 다 확립되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세부적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어느 하나도 제대로 갖추어진 것이 없다. 부동산 투기억제를 명목으로 사유재산권이 근본부터 흔들리고, 특정집단의 횡포에 대외개방은 뒷전으로 밀리고 있다. 경쟁을 방해하는 각종 규제가 만연되어 있다.
국내외 투자 수준, 새로운 사기업들의 성장 그리고 체제전환 성공의 지표들 모두 국가가 얼마나 좋은 제도를 제공하느냐 그리고 국가 자신이 강탈을 얼마나 절제ㆍ억제하느냐에 달려 있다. 만약 ‘떼법’이 횡행하여 사회질서의 근본이 훼손되고, 사법부와 법의 집행이 신뢰받지 못하고, 재판결과가 제대로 집행되지 못하면, 그리고 만약 공직자나 정부가 사적 투자에 영향력을 크게 행사하면, 국가는 내려앉는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정부가 시장을 확장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결론지을 때 우리는 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어떻게 시장 확장적 정부를 더 가질 수 있는가, 즉 어떻게 정부의 시장 확장적 역할을 더 확대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 말이다. 이에 대한 답도 의외로 간단하다. 민주주의를 제대로 하면 된다. 즉,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존중되고, 3권이 분리되어 서로 견제와 균형이 확립되고, 정책이 국익 관점에서 충분히 경쟁적으로 논의되기만 하면 된다. 문제는 이들 조건이 현실에서 충족되지 않는 데 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제대로 기능하는 민주정치 체제하에서 시장을 확장하는 정부이다.
최 광 (한국외대 경제학부 교수/前 보건복지부 장관, choik01@cho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