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진화(evolution)”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최근에 발간된 어떤 책 제목처럼 “시장경제의 진화적 특질”이라는 표현이다. 시장경제는 진화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아주 적절한 표현이다. 그런데 진화라는 말과 관련하여 두 가지 문제가 제기된다. 하나는 존재론적 문제로서 진화란 무엇인가의 문제, 두 번째는 진화를 어떻게 이론적으로 파악하는가의 문제이다.
진화론의 대가(大家)인 독일의 비트(U. Witt) 교수에 따르면 진화는 어느 한 시스템의 내생적ㆍ불가역적 그리고 미래에 대하여 열려 있는 ‘변화과정’을 의미한다. 시스템이 자기 스스로 그 내적 구조가 변동하는 경우 그 변동을 진화라고 부른다. 변화의 원천이 외생적인 경우의 변화는 진화가 아니라고 본다. 가역적 변화 그리고 닫힌(결정주의) 변화도 진화가 아니다. 경험적으로 볼 때 이와 같은 성격을 가진 대표적인 것이 생물학의 유전자 풀(gene pool), 아이디어와 같은 인간정신의 산물, 행동규칙과 같은 제도, 그리고 경제학의 인식 대상으로서 시장경제 현상이다. 시장경제는 그 내부구조가 스스로 변동하는 진화적 시스템이다. 이것은 단순한 주장이 아니라 경험적 명제이다.
시장의 진화적 성격을 어떻게 이론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가? 유감스럽게도 다윈(Ch. Darwin)의 생물학에서 암시하는 진화원리(돌연변이-자연선택-확산)를 이용하여 문화적ㆍ경제적 진화를 이해하려고 하는 시도들이 있다. 윌슨(O.E Wilson)의 사회생물학, 넬슨(R.Nelson) 등의 비유적 다윈이즘, 호득선(G.M.Hodgson) 등의 보편적 다윈이즘 등이 그렇다.
경제학계를 지배하고 있는 주류경제학이 잘못된 경제학이기 때문에 진화론자들이 생물학적 진화원리를 경제학에 도입하려는 노력은 충분히 이해할만하다. 주류경제학은 시장경제의 진화적 성격을 전혀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주류경제학의 바이블로 인정받고 있는 맨큐(G. Mankiew)의 『맨큐경제학』에서 볼 수 있듯이 그 같은 경제학의 초점은 균형에 관한 기술이다. 이 균형은 정지된 상태이다. 외생적 변화가 없으면 꼼짝도 안 한다. 시장경제를 폐쇄적이고 결정주의적 시스템으로 이론화하고 있다. 실제조건과 전적으로 다르게 이론화하기 때문에 이로부터 도출된 공공정책도 반(反)자유주의이다.
오스트리아학파의 거성인 하이에크(F. A. Hayek)와 미제스(L. v. Mises)는 그 같은 경제학은 고전물리학의 전통을 고스란히 이어받았음을 확인하면서 이를 과학주의라고 비판하고 있다. 경제학이 제2의 물리학이 되어버린 것이다. 경제이론사학자로서 저명한 블로그(M. Blaug)가 “주류경제학은 병들었다”고 개탄하는 것도 물리주의(physicalism) 때문이다.
다윈주의자로 유명한 메이어(E. Mayr)가 확인하고 있듯이 1859년 다윈이 『종의 기원』을 통하여 극복하고자 했던 것이 당시 영국을 지배했던 뉴턴의 세계관인데 흥미롭게도 주류경제학의 전통을 세운 1870년대 초의 이른바 “신고전파 혁명”은 다윈혁명이 내쳐버린 뉴턴의 자연관을 주워 담아 이를 모방한 것이었다. 생물학과 비교한다면 오늘날 주류경제학이 얼마나 뒤처져있는가를 또렷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다윈주의자들이 주장하듯이 시장경제의 진화적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 다윈의 자연관을 경제학에 도입하는 것이 적합한가? 흥미로운 것은 보편적 다윈이즘이다. 이것은 오늘날 경제학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자연과학은 물론 모든 학문영역에 다윈의 세계관을 보편적으로 적용할 것을 요구하는 일종의 자연철학의 전통이다. 그러나 시장경제의 진화를 이해하기 위해 다윈의 진화원리의 적용은 부적합하다.
여러 관점에서 그 적용의 부적합성을 찾을 수 있지만 각별히 주목하는 것은 다윈의 진화원리의 핵심인 “자연선택”이다. 유전적 맥락에서는 유기체는 자연선택이라는 도태 위협에 대하여 속수무책이다. 다시 말하면 변이(혁신)와 자연선택 사이에는 피드 백(feed-back) 관계가 없다. 돌연변이는 자연선택과 전적으로 독립적으로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장경제의 진화는 이와는 전적으로 다르다.
시장경제의 구성원리는 경쟁인데, 이것은 자연의 세계와는 달리 두 가지 메커니즘의 상호작용이다. 하나는 내적 선택(internal selection)이다. 경쟁으로부터 도태될 위험을 예견하고 이를 피하기 위해 인간들은 의식적으로 학습하고 혁신을 한다. 인간의 의도적ㆍ인지적 학습과정과 혁신과정, 이것이 자연에서 볼 수 없는 피드 백 관계를 말해주는 내적 선택이다. 여기에 가세하는 것이 외적 선택(external selection)이다. 인간 이성의 한계 때문에 잘못 예견하고 잘못 학습할 수 있다. 잘못된 혁신도 있다. 이런 잘못을 발라내는 것이 문화적 거름 장치로서 외적 선별이다.
우리가 주지해야 할 것은 문화적ㆍ경제적 진화에서는 이와 같은 두 가지 선별메커니즘이 상호작용하기 때문에 그 진화의 속도와 규모 그리고 질이 생물학적 진화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는 점이다. 그 같은 상호작용의 결과는 시장경제를 기반으로 하는 확장된 열린사회이다. 이것이 생물학적 진화와 문화적ㆍ경제적 진화를 이론적으로 분명히 구분해야 할 이유이다.
따라서 생물학을 모방하여 경제학을 구성하려는 어떤 노력도 온당하지 않다. 경제학이 뉴턴의 자연관에서 다윈의 자연관으로, ‘물리주의’에서 생물주의(biologism)로 바뀔 뿐이다(K. R. Popper). 보편적 다윈이즘의 강력한 옹호자로 유명한 철학자 도킨스가 종교ㆍ음악ㆍ도덕ㆍ관습 등, 문화적 요소(meme)를 다윈이즘으로 만들기 위해 고안한 “미메틱스(mimetics)”도 비록 이론적으로는 흥미롭다고 해도 주관적 인지에 기초한 인간의 문화적 지식과 노하우 습득을 설명할 수 없고 오히려 그 같은 습득과정을 오도할 뿐이다.
생물학적 진화와 관련이 없이 시장경제의 진화과정을 파악하기 위한 독립적인 인식 틀은 무엇인가? 이에 대해서는 주관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오스트리아학파가 잘 말해주고 있다. 하이에크의 발견의 절차, 커츠너(I. Kirzner)의 기업가적 기민성, 그리고 반버그(V. Vanberg)의 창조적 과정(creative process)이 그 틀이다. 인간사회의 진화에만 적합한 개념적 틀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자유주의에 충실한 공공정책을 도출할 수 있는 견고한 이론적 기반이다. 이것이 오스트리아학파의 진화 사상에 주목해야 할 이유다.
민경국 (강원대학교 경제무역학부 교수, kkmin@kangwon.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