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은 여러 구체적인 사실 내지 현상에서 공통된 요소를 뽑아내 일반화한 보편적 관념을 의미한다. 개념은 일반적으로 사고와 판단에 의해 얻어지지만 역으로 사고와 판단의 준거로 기능하기도 한다. 후자의 경우 ‘개념 선점(先占)’은 매우 중요하다. 개념을 선점하면 ‘프레임 효과’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용어의 선점과 ‘프레임 효과’
‘프레임 효과’는 사고가 특정한 틀에서 벗어나지 못해 고정되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누군가가 보여주는 틀 안에서 현상을 인식하고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건 A가 발생했을 때 누군가가 사건 A를 사건 B와 연계시켜 설명하면 그러한 설명에 접한 사람들은 사건 A와 B라는 틀 안에서만 사건을 보게 되어 ‘새로운 틀’ C로 사건을 보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프레임 효과’를 인정하면, 자신이 원하는 바대로 개념을 ‘조작적으로 정의(定意)’한 사람은 일반대중의 사고를 자신이 바라는 방향으로 끌고 갈 수 있다는 추론도 가능하다. 조작적 정의는 개념의 ‘왜곡’을 함축한다. 자신 또는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을 위해 개념을 ‘왜곡’하기까지 한다면 사회적 갈등과 경제적 손실은 그만큼 증폭될 수밖에 없다.
전교조가 칭하는 ‘일제고사’의 정식 명칭은 ‘국가수준 학업성취도평가’이다. 정식명칭이 길어 이를 줄여 부르기 위해 ‘일제고사’란 용어를 썼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명칭을 줄여 부르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보다 중립적으로 ‘학업평가’ 또는 ‘평가고사’ 등으로 불렀어야 했다. 굳이 ‘일제고사’로 칭한 것은1) “모든 학생들에게 일제히 시험을 강제해 모든 학생을 일제히 한 줄로 세우는 시험”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극대화하기 위한 것으로 추측된다. 전교조는 “성적을 기준으로 학생을 한 줄로 세우는 것은 어린 나이의 학생들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며, 더 나아가 학생들을 ‘서열화’하는 반(反)교육적 처사”라고 주장한다. 뿐만 아니라 일제고사로 교육현장에 파행이 빚어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초등학교에서조차 일제고사 대비 야간학습이 생겨나고, 학교 수업이 일제고사 과목 위주로 편성돼 교육의 균형이 깨진다는 것이다. 시험 성적으로 학생과 학교를 줄 세우는 마당에 인성교육과 적성교육을 제대로 시행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한다.
학업성취도 평가가 ‘서열화’인가?
“국가수준 학업성취도평가(이하 평가고사)”의 목적은 학생을 일렬로 줄을 세우려는 것이 아니다. 학생의 학생성취도를 “보통이상, 기초학력, 기초미달”의 3등급으로 구분할 뿐이다. 학업성취도 등급도 상대평가가 아닌 절대평가로 시행하고 있다. 학생의 학업성취 정도를 알려줌으로써 자신을 ‘객관화’하라는 교육적 메시지가 담겨 있다.2) 평가고사의 목표는 학업평가를 통해 지원이 필요한 학생과 학교에 부족한 것을 보충해 줌으로써 학생 간, 학교 간 학력차이를 좁히는 것이다. 객관적 평가에 기초해 뒤진 학교를 지원함으로써 교육격차를 줄이는 것은 국가의 당연한 책무이다.
서열화도 ‘증오’를 불러일으키는 정치용어에 가까운 적절하지 않은 용어이다. 학생의 학업성취도를 알려주는 것이 학생을 ‘서열화’하는 것일 수는 없다. 서열화는 말 그대로 구조적 칸막이로 인해 ‘계층 간 이동’이 불가능한 상태를 의미한다. 서열화가 이루어진다면 학업성취도가 낮은 학생은 결코 낮은 구간을 벗어날 수 없게 된다. 교육은 학력이 부진한 학생을 끌어올리는 것이다. 따라서 고착화를 깨고 계층 간 이동이 가능하게 하는 것이 교육의 본래적 기능이다. 청소년을 대상으로 서열화 운운하는 것은 교육의 본래 기능을 방기하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전교조 논리에 충실하면 서열화를 피하기 위해서는 학업평가를 하지 말아야 한다. 이는 ‘경쟁’을 부정하는 것이다. 상처를 줘서 안 된다면 언제까지 학업평가를 미뤄야 하는가? ‘경쟁’을 끝까지 피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고학년 들어 처음 맞이하는 경쟁은 ‘충격’ 그 자체일 것이다. 피할 수 없는 것은 담담하게 맞아야 한다. 이를 가르치는 것이 교육인 것이다.
‘하이에크’가 일찍이 설파했듯이 경쟁은 일종의 ‘발견과정’이다. 치열한 경쟁을 통해 자신의 소질과 적성을 발견할 수 있다. 경쟁을 통하지 않고 ‘경쟁의 결과’를 미리 알 수 있다면 경쟁은 낭비일 뿐이다. 경쟁이 의미를 갖는 것은 경쟁을 통하지 않고서는 경쟁의 결과를 미리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경쟁을 미루는 것은 학생들로 하여금 진로 탐색의 기회를 갖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대학진학률 85%’가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나라의 자랑거리일 수는 없다. 대학진학은 일종의 ‘사회적 편승’이 돼버렸다. 개인적 성공을 위해서는 사회에 조기 진출하는 것이 더 좋은 학생들마저, 자신의 재능에 대해 돌아볼 기회를 갖지 못해 ‘군집적 행동’을 한다. 평가를 하지 말라는 것은 학생들이 앞날을 탐색하지 못하도록 ‘무지의 장막(veil of ignorance)’을 치는 것이다. 일제고사 대비 야간학습 등 교육현장에서의 파행은 그것으로 고치면 된다. 이것이 성취도평가를 막는 방패가 돼서는 안 된다.
일관성 결여된 전교조 논리
일제고사 방식의 전수평가 대신 표집 방식의 표본평가로도 얼마든지 학업성취도를 평가할 수 있다는 것이 전교조의 논리이다. 그런데 전교조는 “일제고사는 학생들을 줄 세우기 때문에 반대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표본에 뽑힌 학생들만 줄을 세우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인가? 그리고 표본을 어떻게 뽑을 것인가? 표본에 들지 않기 위해 애쓰는 진풍경이 벌어질 것 아닌가? 전국단위의 평가고사는 2008년부터 시행돼 현재 진행 중이며, 초중등교육법(제9조)과 그 시행령(제10조)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따라서 이제 와서 부분적으로 시행 평가하자는 것은 법을 어기자는 것이다. 그리고 표집평가는 학력을 여론조사 방식으로 평가하겠다는 발상으로 적절하지 않다.
전교조는 학생들과 학부모에게 일제고사의 선택권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체험학습’과 ‘대체수업’을 그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평가고사와 관련해 ‘선택권’이 타당한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선택은 ‘동일한 범주’의 대안들 간의 취사를 의미한다. 하지만 전교조가 말한 선택권은 다른 범주의 대안을 같은 평면에서 비교하는 것이다. ‘범주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평가고사와 체험학습과 대체수업이 동일한 범주의 선택일 수 없다. 전교조의 선택권은 ‘시험을 거부할 수 있는 합법적인 경로’를 열어주겠다는 것이다.3) 선택권이 ‘의무면탈’의 방편이 돼서는 안 된다.
경쟁을 거부하는 전교조
서열화를 내세운 ‘견강부회’식의 지나친 반대논리는 역설적으로 평가거부의 이유가 다른 데 있음을 시사한다. 전교조 학업성취도 평가반대의 기저에는 학업성취도 평가를 통해 학교 간 경쟁이 촉발될 수 있다는 의구심이 깔려 있다. 학교 간 경쟁은 필히 교원평가를 수반할 것이다. 하지만 학교 교육의 질을 높이려면 학교 간 경쟁은 필수불가결하다. 따라서 학교 간 경쟁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표 1> 분야별 재원배분
<표 1>은 국가재정의 분야별 재원배분 현황이다. 정부의 기대되는 다양한 기능 중 당연히 정부 몫이라고 인식되는 중요한 기능별 지출을 정리한 것이다. 2010년 교육예산은 38조3천억 원이며, 2011년 교육예산 요구액은 40조5천억 원이다. 2010년에 이어 2011년에도 교육예산은 국방예산(31조6천억 원)과 SOC 예산(25조2천억 원)보다 유의한 정도로 많다. 사회간접자본 확충은 정부의 고유기능으로 간주되는 부분이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유일한 분단국이며 최근의 천안함 피침에서와 같이 북한의 위협은 상존하고 있다. 그럼에도 교육에 이렇게 많은 재정을 투입하는 것은 교육은 미래를 위한 투자이기 때문이다. 교육예산의 대부분은 초ㆍ중등교육 지원을 위해 투입된다. 교육투자의 성과는 ‘학업성취도’로 측정된다. 따라서 학업성취도 평가는 국민의 혈세가 제대로 쓰이고 있는지를 가늠하는 잣대가 아닐 수 없다. 교육정책은 진실에 기초해 미래로 열려 있어야 한다. ‘교육자치’는 분명 맞는 방향이지만, 이념성향에 의거, 학업성취 평가를 부정하는 방향을 상실한 ‘무한자치’가 돼서는 안 된다.
조동근 (명지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dkcho@mj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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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학부모인 기성세대의 입장에서 ‘일제고사’는 마치 일제(日帝) 시대의 시험 같은 느낌마저 줄 수 있다.
2) 그런 점에서 건강진단과 유사하다 할 수 있다. 우선 자신의 건강상태를 알아야 자신의 건강을 지키고 또 개선
할 수 있게 된다.
3) 학생에게 “시험을 보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것은 “시험을 보지 말라는 것”과 같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