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martin-martz-RhF4D_sw6gk-unsplash.jpg

l    소통   l    KERI 컬럼

KERI 컬럼

전문가들이 펼치는 정론입니다.

한국경제연구원_WHITE_edited.png

전력대란의 시장원리


여름을 무사히 넘기고 한숨돌린 발전기들이 정비에 들어간 사이 때 아닌 더운 날씨의 기습은 순식간에 예비전력을 위험수준으로 몰고 갔다. 강제적 수요차단이 불가피했으므로 전례없는 순환단전 사태가 빚어졌다. 1960년대 중반 무제한송전시대가 시작한 이후 처음 겪는 전력대란이었다. 긴급 환자의 치료가 중단되었고, 움직이던 엘리베이터가 멈춰 섰다. 공장 작업이 불시에 중단되는가 하면 양식장의 물고기가 떼죽음을 당하였다. 여론이 전력거래소의 관리 잘못을 질타하는 가운데 정부는 관계 당국의 책임자들을 희생양으로 삼고 기강확립을 다짐하면서 사태를 마무리하려고 할 것이다.


시행 단계에서 일처리가 잘못된 점이 없지는 않겠지만 전력대란의 근본원인은 팽창하는 수요에 비하여 워낙 부족한 설비용량이다. 지금까지도 평소에는 그럭저럭 견디지만 갑자기 덥거나 추워서 냉난방 수요가 급증하면 예비율은 수시로 위협받아 왔다. 그 동안의 계통운영은 순환단전하지 않으면 순식간에 광역정전 사태로 진전될 위기의 언저리에서 벌어진 곡예였다고 할 수 있다. 책임자를 내친 자리에 누구를 앉혀 놓아도 현재와 같은 여건이라면 전력대란은 반드시 재발한다.


순환단전은 광역정전사태로 당할 훨씬 큰 피해를 막는 최후수단


순환단전을 이해하기 위하여 짐을 나르는 당나귀를 생각해보자. 당나귀가 감당할 만큼만 짐을 싣는다면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런데 짐을 조금씩 더 많이 싣는다면 당나귀는 힘겨워 할 것이고 그래도 더 싣는다면 종내에는 주저앉고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발전소가 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이 스위치를 올려 불을 켜고 모터를 돌리고 냉방을 가동하는 행위는 정확히 발전기라는 당나귀 등에 짐을 싣는 행위와 같다. 발전 용량이 충분하면 전력소비가 늘어나도 발전기들은 필요한 전력을 거뜬히 공급해낸다. 그러나 전력소비가 계속 증가하면 당나귀가 힘겨워 하듯 발전기들도 과부하에 시달린다. 끝내 위험수준을 넘어서면 당나귀가 주저앉아 일어나지 못하듯 모든 발전기들이 일시에 멈춰서는 광역정전이 일어나는데 이 사태를 막는 최후 수단이 순환단전이다.


순환단전은 광역정전을 미리 예방하려는 조치다. 마치 당나귀 등에 너무 많이 실린 짐을 덜어주듯 지침에 따라서 무작위적으로 선택된 지역들에 대하여 돌아가며 한 두 시간씩 단전함으로써 발전기들의 부담을 덜어주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난데없는 단전에 적지 않게 피해를 입지만 광역정전으로 당할 훨씬 더 큰 피해는 막는다. 들끓는 여론에 휩쓸려 희생양으로 단죄 받을 것이 분명한데도 광역정전을 막기 위하여 순환단전을 시행한 당사자는 지탄의 대상이 아니라 영웅일지도 모른다.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 발전설비용량에 숨통이 터지려면 현재 건설 중인 발전기가 여럿 완공되는 2014년까지 기다려야 한다. 발전소 건설계획이 기준삼은 전력수요예측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보통 장기 수요예측은 GDP 성장추세를 보고 가늠한다. 그러나 그 동안 비정상적으로 낮게 책정된 전기요금은 기름과 가스 난방을 전기난방으로 바꾸는 등 다른 연료로 쓰던 용도에까지 전기를 쓰도록 유도했기 때문에 예상 못한 과다수요가 발생한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2014년까지 세 번의 겨울과 두 번의 여름을 거의 현재의 발전설비만으로 견뎌야 한다.


그런데 원가에도 못 미치는 전기요금이 지속되면서 전기수요는 여전히 급증하는 중이다. 과연 앞으로 다섯 번의 전력 다소비 계절을 무사히 겪어 낼지 걱정할 수밖에 없다. 이번 전력대란을 관계자 문책으로만 끝내어서는 안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순환단전보다 더 세련되고 효과적인 수요감축 방안은 시장


순환단전은 정부 인가 요금 체제에서 사용되는 방법이다. 현재의 요금이 10이고 최대 공급능력이 900인데 전기를 쓰겠다는 수요가 1,000이면 최소한 수요 100을 차단해야 광역정전을 막는다. 전력거래소가 임의로 수요 100을 차단한다면 한 편에서는 게임을 즐기는 가운데 다른 한 편에서는 긴급 수술환자가 정전으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순환단전은 단전지역내에서는 무차별적인 것이어서 상대적으로 덜 필요한 용도의 전기만 골라서 단전하지는 못한다.


그런데 전기요금을 시장에 맡긴다면 이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있다. 전기가 모자라면 시장은 그 시간대의 전력 요금을 예컨대 20으로 올릴 것인데 그렇게 되면 심심풀이로 게임을 하던 소비자는 스위치를 내리겠지만 긴급 수술환자를 치료하는 병원은 여전히 전력을 사용할 것이다. 순환단전과 마찬가지로 수요차단이 이루어진 것은 맞다. 그러나 이 수요차단은 강제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덜 필요한 용도에 전력을 쓰던 사람들이 스스로 스위치를 내린 결과이므로 느닷없는 순환단전과 같은 피해는 일어나지 않는다.


사람들이 전기요금을 항상 실시간대로 파악하고 있기가 어렵지 않느냐는 우려가 있지만, 위기에 전기요금이 큰 폭으로 오를 때에는 순환단전을 예고하는 방식으로 요금폭등을 알릴 수도 있고 소매전력업자가 직접 알려올 수도 있다. 앞으로 스마트그리드가 보편화하면 누구나 현재의 요금을 실시간대로 파악한 가운데 스위치를 켜고 끄게 되고, 불요불급한 전력사용은 요금이 낮은 시간대에 이루어지도록 미리 프로그램해 둘 수도 있다.


공급능력을 확대할 수 없을 때는 수요를 줄이는 것이 유일한 해법이다. 사실 막심한 피해를 유발한 순환단전도 그 본질은 결국 수요 감축 아닌가? 순환단전을 예방하기 위한 절전 운동도 벌여야 한다. 그러나 가장 세련되고 효과적인 수요 감축 방안은 시장이다. 우선 요금을 원가 이상으로 올려야 하고, 시간대별로 수요와 공급을 반영하는 요금이 책정되도록 전력부문에도 시장도입을 완결해야 한다. 희생양 몇 명을 징계하고 관리체제를 강화하는 것만으로 수습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이승훈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shoonlee@snu.ac.kr)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