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나라에도 없는 K-재정준칙이 발표되었다. 스스로에게 면죄부와 허가권을 주는 재정준칙이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야당시절 국가채무 비율 40%를 넘기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라며 비판의 날을 세우던 문재인 대통령은 집권 후에는 40%의 근거가 뭐냐며 유체이탈 화법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현 정부에게 절제의 유전자는 없는 듯하다. 정책 무능력을 재정으로 메우려는 재정중독증으로 국가채무는 눈덩이처럼 늘어나고 있다. 집권 3년 만에 국가채무가 220조 원 증가하였다. 남은 임기 2년간 223조 원의 국가채무가 더 증가하여 국가채무 비율이 50%를 넘어설 전망이다.
재정준칙은 스스로 절제할 능력이 없고 인기영합적인 정부가 들어서 방만한 재정 운용으로 재정 건전성이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한 제도적 장치이다. 법적 구속력 없는 느슨한 상한선, 어느 나라에도 없는 꼼수 산식, 불명확한 예외 규정 등 국회의 예산 의지를 무력화시키고 대통령의 의지대로 재정을 운용할 수 있는 위험한 재정준칙을 발표하였다. 적용 시점을 4년 뒤로 늦추면서 방만한 재정 운용에 대해 합법적인 면죄부를 주고 있다.
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 60%와 통합재정수지 –3%를 총량규제로 설정하였다. 역대 정부에서 암묵적으로 지켜 왔던 마지노선 40%에 비해 느슨하기 짝이 없는 상한선이다. 아직 성숙단계에 있는 국민연금이 흑자를 기록하고 있어 사회 보장성 기금을 포함한 통합재정수지가 통합재정수지보다 양호한 편이다. 현 정부 들어 통합재정수지가 적자로 돌아섰지만, 올해 –4.4%로 관리대상수지 비율 –6.1% 양호한 편이다. 상대적으로 좋은 지표를 취사선택했다는 비판이 나오는 것이다. 여기에 둘 중 하나만 만족해도 재정준칙을 지킨 것으로 간주하는 꼼수산식까지 끼워 넣어 재정 운용의 재량권에 제한을 받지 않도록 설계하였다. 고무줄처럼 늘릴 수 있도록 예외 규정을 두고 있고 매 5년마다 채무와 수지 상한을 자율적으로 조정할 수 있도록 시행령으로 규정할 수 있게 하였다. 의회의 견제 없이 행정부가 재정 운용의 전권을 갖겠다는 의도로 비치고 있다.
재정준칙을 도입한 나라가 1985년에 5개국이었던 것이 2013년에 87개국, 현재는 117개국으로 빠르게 늘어났다. 이런 데는 정치적 결정에 내재되어 있는 구조적 모순을 제도적으로 교정하지 않으면 재정이 지속 가능할 수 없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정권이 스스로를 규율하고 재정건전성을 유지한다면 제도적으로 재정을 통제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인기영합적인 정책을 시행함으로써 얻는 이득이 크다 보니 대부분의 정부가 적자편향성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 정치인들은 다음 선거가 최대 관심사항이기 때문에 정책적 판단의 시야가 매우 짧다. 효과가 단기간에 나타나는 정책과 지지자들에게 혜택이 집중되는 정책에 유혹되기 쉽다. 더욱이 비용은 십시일반으로 일반 국민에게 퍼지거나 미래에 나타나기 때문에 국민들이 비용을 인지하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조세저항도 약하기 마련이다. 그렇다 보니 국가채무가 늘어나고 미래에 부작용이 발생하는 것엔 관심이 없고 현재의 지출로 인기를 얻는 데 집착하게 된다. 이러한 과도한 지출을 막기 위해 많은 나라가 재정준칙을 도입하고 있는 것이다.
권력 구조가 의원내각제이든 대통령제이든 행정부와 의회 간의 예산갈등은 있기 마련이다. 의원내각제에서는 예산갈등이 발생하면 의회를 해산하고 총선거를 통해 내각을 새롭게 구성하여 예산안을 의결하는 방법으로 예산갈등을 해소한다. 대통령제에서는 의회의 예산 의지가 대통령의 예산 의지를 압도하거나, 대통령의 의지가 의회의 예산 의지를 무력화하는 예산갈등이 빈번히 발생한다. 이는 행정부와 입법부가 합리적 재정 운용을 위해 상호 견제하고 협력하는 경쟁적 상황을 만들어 내는 과정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와 같이 재정준칙이 법률로 정해져 있지 않고 의회마저 여당이 압도할 경우 적자 편향성은 도를 넘을 가능성이 높다. 이번 재정준칙이 의회의 예산 의지를 무력화시키고 재정 운용의 전권이 대통령에게 귀속되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점에서 차라리 재정준칙이 없는 것보다 위험하다.
우리나라가 예산의 비법률주의를 채택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재정 건전성이 유지되어 온 데는 재정 건전성에 대한 전임 대통령들의 각별한 관심과 절제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의회의 견제기능을 무력화시키면서까지 인기영합적인 재정지출을 확대한다면 건전재정을 훼손한 대통령으로 기록될 것이다. 위대한 지도자는 현재 보이는 혜택은 물론 눈에 보이지 않는 부작용과 미래에 발생하는 비용까지 고려한 정책을 펼친다. 제도도입까지 아직 시간이 있다. 스스로에게 보다 엄격해 져야 한다.
조경엽 (한국경제연구원 경제연구실장 / glcho@keri.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