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생명체가 오랫동안 건강하게 살고 싶어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유기체인 국가도 오랜 시간 동안 망하지 않고 존속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는다. 그러나 역사의 교훈은 국가들이 생각보다 그렇게 오래 존속하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국제정치학자인 타니샤 파잘(Tanisha Fazal) 박사는 1816년부터 2000년 사이 지구상에 존재했던 국가는 모두 207개 나라였는데, 이 기간 동안 66개 국가가 각종 이유로 멸망함으로써 국제무대에서 사라져 버렸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왕들이 주인이 아니라 ‘국민’이 주인인 국가들로 이루어진 국민국가(nation state)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 1816년인데 이로부터 184년이 지난 2000년까지 세계 역사 속에 존재했던 국가들 중 무려 32%가 사라져 버렸다는 말이다. 국가의 멸망은 스스로 멸망한 경우와 외적의 침입을 물리치지 못해 멸망한 경우 등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멸망한 국가 중 스스로 몰락한 국가는 16개국이며, 외적의 침략 공격을 막지 못해 망한 나라가 나머지 50개국이다.
자국 국민들에게 국민생활의 기본을 제공하지 못하는 나라들은 스스로 멸망할 수밖에 없는데, 국민생활의 기본이란 국민들이 먹고, 입고, 자는 문제를 말한다. 국민을 먹이고 입히는 것, 그리고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일이야말로 국가가 오래 살기 위한 필수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국가의 필수적인 일을 도무지 제대로 행하지 못하면서도 상당기간 멸망하지 않고 버티고 있는 정치체제가 하나 있다. 바로 북한이다. 이미 1990년대 초반, 국제공산주의가 총체적으로 붕괴되던 무렵 북한도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곧 붕괴될 것이라고 예측되었었다. 1990년대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회주의 국가들은 붕괴해서 없어져 버렸던지 혹은 중국, 쿠바, 베트남처럼 자유주의 시장경제제도를 부분적으로나마 수용함으로써 멸망의 길을 회피했던지 두 가지 중 하나다.
우리나라의 친북좌파들은 시장경제제도의 도입을 통한 경제개혁을 거부하면서도 망하지 않고 버티고 있는 북한을 존경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들은 다른 모든 사회주의 국가들이 망했거나 ‘변절’했는데도 불구하고 북한은 꿋꿋이 버티고 있는데, 그것이야말로 주체사상과 선군정치에 기초한 탁월한 지도자의 존재 때문이라며 북한체제를 찬양한다.
북한이 지난 20년 동안 망하지 않고 버텨온 것은 북한 특유의 ‘불량국가(rogue state)’ 수법이 먹혀들었기 때문이다. 국민을 먹이지도 못하는 나라가 ‘외세의 침략’ 운운하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 일이지만 북한 정권은 핵무기, 화학무기, 장거리 미사일 등 대량 파괴무기의 개발을 통해 국제사회로부터 많은 것을 얻어낼 수 있었다.
냉전이 종식된 세계에서 미국은 국제 공산주의의 지원을 전혀 받을 수 없는 다 망해가는 북한을 미국에 대한 ‘전략적’ 위협이라고 간주하지 않았고 그 결과 북한을 멸망시켜야 할 시급한 이유도 없었다. 탈냉전 시대는 이처럼 북한이 버틸 수 있는 틈새를 제공했다.
또한 지난 10년 동안 남한에 존재했던 정치세력 역시 북한의 생존에 도움이 되었다. 고도의 전략적 고려에 기반을 둔 것이어야만 할 대북정책이 우화(寓話)에 근거를 둔 정책이었던 시절이었다. 돈으로 평화를 살 수 있다는 몰상식이 대한민국 사회를 지배하던 지난 10여 년 동안 북한은 연명(延命)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비정상적 방법이 무한정 지속될 수는 없는 일이다. 북한은 주민들에게 배급을 주지 못하게 되자 주민들에게 스스로 먹고 사는 방법을 강구하라고 했고(2002년의 7ㆍ1 조치), 결국 북한 주민들은 스스로 살 수 있는 터전을 개척했다. 소위 장마당이라고 불리는 시장이 북한 주민들의 생존을 보장하는 공간이었다. 사회주의 체제라면서 주민들에게 배급도 줄 수 없는 북한체제가 무너지지 않고 버틴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북한 사회 밑바닥에서 자라나기 시작한 ‘자본주의’였다는 사실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국민을 폭압적으로 억누름으로서만 존재할 수 있는 김정일 체제가 김정일이 주는 쌀을 쳐다보고 살지 않아도 되는 장마당 주민들을 더 이상 방치할 수는 없었다. 러시아 출신 북한 전문가인 안드레이 란코프(Andrei Lankov) 국민대 교수의 말처럼 “북한 통치자들에게는 집에서 두부를 만들거나 편리한 옷을 재봉하는 주민들이 ‘미국제국주의'나 ‘남조선 괴뢰'보다 더 무서운” 존재가 아닐 수 없었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에게 ‘낙원은 시장(Paradise is a Bazar)’이다. 시장은 정보가 자유롭게 소통되는 공간이다. 북한 주민들은 장마당에서 알면 안 되는 소식들과 알지 말아야 하는 사실들을 배우게 되었다. 북한 주민들은 간부가 주는 배급 없이도 자기 힘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국민을 먹이지도 못하는 나라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겠다고 큰소리치는 것의 황당무계(荒唐無稽)함도 알게 되었다.
결국 김정일은 작년 11월 30일 자본주의의 싹을 자르는 화폐개혁을 단행했고, 피땀 흘려 벌어 장롱 속에 모아 두었던 쌈짓돈을 날려버린 분노한 북한 아주머니들은 국가 보위부 요원에게도 막무가내로 덤벼드는 판국이 되었다.
하늘같은 권위로 주민을 철권 통치하던 북한의 통치자들은 당황하고 있다. 게다가 무소불위의 독재자 김정일의 건강도 급속히 악화되고 있다. 북한의 통치자들과 남한의 종북(從北) 세력에게 위안을 주었던 북한의 버티기는 이제 끝났다. 작년 초겨울 화폐 개혁을 단행한 이후 북한은 그동안 중지된 것처럼 보였던 ‘종말의 여로’를 다시 시작했다.
당황한 북한 통치세력들은 자신들의 권력 유지를 위한 마지막 수를 두기 시작했다. 2010년이 시작된 이후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냉탕과 온탕을 오가던 북한의 대남 및 대외정책은 결국 ‘천안함 격침’이라는 최대의 자충수를 두고 말았다. 북한의 무력 도발행위는 미국의 항공모함과 잠수함이 서해바다로 진입할 수 있는 정당한 근거를 제공했고, 이는 그동안 국제사회의 비난을 참아가며 북한의 존속을 지원했던 중국을 분노에 몸서리치도록 만들 것이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인지 분명하다. 우리가 할 일이란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일이다. 더 이상 북한 주민들의 고통을 방치하면 안 된다. 더 이상 북한 통치자들의 무력 공갈과 도발에 전전긍긍하며 살아서도 안 된다. 우리 국민 모두가 곧 도래할 북한의 급변사태에 대비해야 한다.
이춘근 (정치학 박사/KERI 자문위원, choonkunlee@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