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산층 붕괴’가 전 세계적 문제가 되었지만 우리나라는 좀 더 심각하다. 기획재정부와 통계청에 따르면 2009년 중산층의 비중은 가처분소득 기준으로 66.7%인데 이는 2008년보다는 소폭 오르기는 했지만 6년 전인 2003년(70.1%)에 비해서는 3.4%포인트 감소했다. 또 한국노동연구원 분석에 의하면 외화위기 이후 지난 10년간 OECD국가 중에서 소득불평등지표가 제일 빠르게 증가했다. 2007년 기준으로 전체 근로자 중에서 가장 중간에 있는 사람의 소득인 중위임금 소득의 3분의 2가 안 되는 저임금 근로자의 비중은 25.6%로 미국(24.5%)을 제치고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했다.
중산층의 감소는 고령화ㆍ기술변화 및 세계화 등에 기인한다. 고령화된 1인가구가 늘면서 중산층에서 빈곤층으로 바뀌는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지난해 1인 가구가 전체 가구 수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0.2%로 2000년 15.6%에 비해 크게 늘었다. 고령화도 OECD국가 중에서 제일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데 그 비율이 2015년 20.7%, 2030년 23.7%로 더 올라갈 전망이다. 또 세계화에 따라 기술변화가 가속화되고 있는데 이것은 고급 노동력에 대한 수요는 늘리지만 단순기능 노동력에 대한 수요를 줄여 소득격차가 커지고 중산층이 감소하게 만든다.
중산층문제의 전통적인 해법은 정부의 사회복지 지출을 늘리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정부의 사회복지 지출이 OECD 국가에 비해 낮다. 그러나 최근의 변화를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지난 5년간 우리나라의 사회복지 지출 증가율은 연평균 10.8%로 OECD 평균(4.9%)보다 훨씬 높은데 지금처럼 전통적인 해법을 답습하면 매우 가파르게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서 간과해서는 안 될 중대한 대목이 있다. 정치논리에 떠밀려 정부가 사회복지에 무분별하게 지출을 늘리면 더 큰 문제가 닥친다는 점이다. 실제로 각국 정부가 사회복지 지출뿐 아니라 경기부양을 위해 국채나 회사채 등으로 부채가 늘면서 재정악화에 시달리고 있는데 최근 그리스 등 유럽 국가는 이러한 문제로 재정이 악화되어 경제위기에 처해있다. 우리나라의 재정 건전성도 이러한 상황을 강 건너 불처럼 지켜볼 수 없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국가재정에 의존한 사회복지는 산업화시대의 모형이라고 할 수 있다.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소득격차가 커지자 정부는 생산물시장에서 공정거래정책을 강화하면서 동시에 사회복지를 위한 정부의 지출을 늘리기 위해서 세금 등을 더 거두는 방식의 소득재분배 정책을 추구했다. 이러한 해법은 생산물 시장이나 노동시장이 비교적 안정적인 질서를 유지할 때까지는 어느 정도 작동했지만 세계화가 되면서 한계에 봉착했고 오히려 부작용을 키웠다. 사회복지 지출의 확대를 위한 재정적자는 국가의 신용도를 위협하고 이것은 민간 기업의 경제활동을 위협한 반면, 실업에서 탈피하려는 근로자들의 의욕을 저하시켜 결국 만성적인『저성장-고실업』의 덫에서 빠져나오기 어렵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중산층 감소문제가 고령화와 세계화 등에 기인하기 때문에 그 해법은 산업화시대의 그것과 달라야 할 것이다. 세계화가 진전되면서 기술 등 환경변화에 대한 적응력의 차이가 소득격차의 급격한 확대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사회복지모형이 필요하다. 그 핵심은 노동시장의 활력을 제고하는 것이다. 세계화시대가 되면서 임금 및 고용의 결정원리가 바뀌고 있지만 기득권이 불공정한 진입장벽으로 작용해 소득격차의 확대문제를 구조적으로 만들었다. 왜곡된 노동시장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임금과 고용이 공정하게 결정되도록 만드는 ‘정공법’이 필요하다. 이러한 공정노동을 통해서 노동시장의 활력을 높이는 것은 정부가 정치적으로 선심을 베푸는 사회복지체제가 아니라 내재화된 사회경제시스템에 의해서 소득분배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개선되도록 만들어 실효성 높은 사회복지체제를 구축하는 의미를 갖고 있다.
노동시장 활력제고에 의한 사회복지 모형의 필요성은 다른 나라에 비해 우리나라가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에 비해서 중산층 감소가 빨라진 이유는 노동시장의 단절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노동시장은 산업구조와 노동운동의 영향으로 대기업부문과 대다수 국민이 종사하는 중소기업부문으로 나뉘고 그리고 정규직부문과 여성이 많이 종사하는 비정규직부문으로 단절되어 있다. 중소기업은 시간이 갈수록 영세화되어 근로자들의 고용이 불안하면서 동시에 대기업에 대한 상대적 임금수준이 저하되고 있다. 또한 비정규직은 정규직의 고용안정을 뒷받침하는 완충 역할을 하면서도 정규직에 비해 임금은 적게 받고 있다. 더군다나 근로자들이 일단 중소기업부문과 비정규직에서 일하면 대기업부문과 정규직부문으로 옮겨가기 어렵게 만드는 구조적인 문제가 심화되고 있다.
우리나라가 이러한 불공정한 임금 및 고용관행을 개선한다면 우리의 여러 가지 문화적인 특수성에 비추어 볼 때 노동시장 활력제고에 의한 사회복지모형이 성공할 가능성이 크다. 다른 나라에 비해서 우리나라는 국민들의 교육열이 높아 정부뿐 아니라 개인까지 합치면 교육에 대한 투자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나라다. 이러한 특징은 기술 등 환경변화 등에 대한 근로자들의 적응력을 높일 수 있는 잠재력이 큰 국가라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장시간 노동이 관행화되어 있는데 이것은 개선해야 할 과제가 분명하지만 달리 보면 근로자들이 변화에 역동적이며 잘 살기 위한 의지도 강한 국가로 해석할 수 있다.
노동시장과 노사관계에서 공정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방안을 공정노동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정부는 공정노동정책을 통해서 근로자들이 일할 수 있는 기회를 공정하게 가지고, 노동력 제공에 대한 보상도 공정하게 이루어지도록 노동시장과 노사관계의 환경을 만드는데 총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공정성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를 모아서 노동시장과 노사관계에서 존재하는 경쟁이 공정하게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은 물론이고 고용과 복지 문제 등에 대한 국가의 보호와 정부의 지원도 공정하게 제공되어 사회경제적 약자가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정부는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한다면 우리나라는 중산층 감소는 물론 국가의 재정악화 문제까지 동시에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김태기 (단국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withkim2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