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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RI 컬럼

전문가들이 펼치는 정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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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야말로 ‘호국’의 의미를 생각할 때


20여일 전 밤에 갑작스럽게 두 동강이 나 침몰하면서 다수의 승조원들이 실종되었던 천안함이 인양됨으로써 그 비극의 진실이 조만간 밝혀질 수 있을 것 같다. 그동안 갖은 억측과 가설들이 난무했던 것을 생각하면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천안함 비극의 진실이 밝혀진다고 해서 유족들의 슬픔이 가실 수는 없다. 또 그들을 수색하는 과정에서 한주호 준위와 금양호의 9인을 비롯한 또 다른 의인들의 살신성인적 희생이 뒤따른 것은 이 비극을 더 없이 참담한 것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이런 유형의 사고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과거에도 이와 유사한, 아니 이보다도 더 참담한 비극이 있었다. 앞으로도 이런 비극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우리가 이 슬픔을 희생자들의 유가족과 친지들의 몫으로만 여기지 말고 우리 공동체를 위한 희생과 나라를 위한 헌신으로 승화시켜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 사회는 열린 민주사회다. 이 민주사회에서 투명성과 참여 및 호국과 애국을 어떻게 유기적으로 연결시키는가에 관한 문제는 중차대한 숙제가 아닐 수 없다. 민주사회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중하게 대접받는 평등한 사회다. 그러나 민주사회에도 공동체를 지키는 ‘위국헌신(爲國獻身)’의 정신은 필요하다. 외부의 적으로부터 공동체를 보호해야 자유와 번영을 누릴 수 있지 않겠는가. 문제는 전쟁터에서 죽는 군인이 있다고 해서 언제나 그리스의 아킬레우스와 트로이의 헥토르처럼 용감하게 싸우다 죽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처럼 조국을 위해 장렬하게 전사했다고 말할 수 없는 유형의 죽음들이 항상 발생한다. 그렇다면 그것을 어떻게 유가족에게 투명하게 한 점의 의혹도 없이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런다고 해도 생때같은 아들을, 가족을, 친구를 잃은 유족들이 수용할 수 있을 것인가. 이렇듯 억울한 죽음의 문제가 발생하면 이 사실을 숨길 수 없는 민주정의 사회에서는 커다란 스캔들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영웅적인 사투 끝에 살아 돌아온 천안함의 군인들에게 군복대신 환자복을 입혀 기자회견을 하도록 한 것은 도저히 이해하기 어렵다. 청천병력과 같은 상황에 직면해 아무것도 믿으려 하지 않은 실종 군인 가족들에게 현실을 이해시키기 위한 고육지책이었을까.


어느 공동체나 애국과 호국은 필요하다. 바로 그것이 ‘시민(citizen)’이라고 할 때 그 특성을 말하는 ‘시민다움(citizenship)’의 핵심이다. 이처럼 ‘시민다움’은 무엇보다 자기가 태어난 공동체에 대한 헌신에 기반을 두고 있다. 특히 그리스 사회의 전통을 보면 이점이 뚜렷하다. ‘시민다움’의 절정은 자신의 ‘폴리스’를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고 또한 공동체의 안녕과 영광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점에서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스파르타의 어머니들이 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경외서의 속담에도 나와 있다. 그들은 전장으로 떠나는 자기 아들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방패를 가지고 돌아오든지, 아니면 방패 위에 누워서 돌아오라.” 이것은 전쟁터에서 나가면 승리하든지 아니면 목숨을 바치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는 지상명령과 같다. 전설에 나오는 로마의 어머니들과 아버지들도 이에 못지않게 자신들의 아들에게 엄격했다. 불명예보다는 죽음을, 나아가 자신들의 아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아버지들에 관한 이야기가 많은데 그 이유는 아들들이 어떤 유혹에 빠져 그 공동체의 대의명분을 저버렸기 때문이다. 죽음은 곧 명예를 되찾는 일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로마인들은 호라티우스를 따라 “조국을 위해 죽는 것은 얼마나 달콤하고 명예로운 일인가!”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공동체 사랑이 현대의 민주주의 사회에서 어떻게 구현될 수 있는가 하는 점에 있다. 엘리트가 아닌 시민들의 참여는 분명 민주정치의 특징이지만 도시사랑이 그 안에서 온전한 형태로 꽃필 수 있는가하는 것은 계속해서 하나의 해법보다는 문제점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 사례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막판으로 치닫던 기원전 406년 아르기누사이(Arginusae) 해전에서 스파르타 군을 무찌른 후 직면했던 선박 침몰사고에서 아테네 시민들이 보여주었던 태도다. 여기서 아테네인들은 나라사랑의 정신을 체득한 성숙한 ‘시민다움’보다는 절제 없는 충동과 감정, 편견과 선동에 휘둘리는 ‘포퓰리스트’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아테네 군이 아르기누사이 해전에서 어렵게 스파르타 군과 싸워 승리하여 돌아오는 도중 폭풍우를 만나 몇 척의 배는 침몰했고 그 과정에서 일부 병사들이 익사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들이 아테네에 도착했을 때 항구에 나온 사람들의 표정은 승리를 축하하는 분위기가 아니라 익사한 병사들에 대한 책임을 묻는 분위기였다. 드디어 전투의 지휘관들이 승리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물에 빠진 병사들을 구조하는데 소홀했다는 고발이 제기되었다. 고발자들은 그 장군들을 처형하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라고 주장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이 주장에 동조하였다. 널빤지를 타고 떠 있다 구조된 한 병사가 “동료들이 죽어가면서 장군들을 고발해 줄 것을 당부했다”는 증언을 하면서 민중들의 흥분은 극에 달했다. 결국 전투에 참가했던 장군들은 민회의 일원이었던 소크라테스의 적극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모두 유죄판결을 받았고 이들을 옹호했던 장군들을 포함하여 여섯 명의 장군들이 사형을 당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유능한 장군들을 스스로 죽인 것에 대해 후회하고, 이번에는 장군들을 고발했던 자들을 재판해서 유죄판결을 내리게 된다.

그렇다면 최근 천안함 사고에 대해 우리 사회가 보인 태도는 2,300년 전 아르기누사이 해전 후 선박 침몰사고를 당해 감정과 격정에 휘둘리는 태도를 보인 아테네인들과 달랐을까. 그렇다고 말하기 어렵다면 절제와 엄숙함보다 포퓰리즘과 감상주의(sentimentalism)가 성행했기 때문이다. 군 당국에도 굳건한 호국철학이 부족했고 언론은 물론, 정치인들도, 시민단체들도 절제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아군의 오폭을 말하는 이들도 있었고 자작극으로 몰아붙이는 이들까지 있었다. 이러한 현상들은 우리가 민주제를 유지하는 한 감내할 수밖에 없는 비용이기도 하지만 “공짜 점심 없다”는 말처럼 “공짜 국가도 없는 법”이다. 희생과 헌신정신이 없고 편안함과 호기심으로 일관하는 공동체가 어떻게 지속 가능성을 가질 수 있겠는가.

일찍이 플라톤은 『국가론』에서 양질의 공동체가 유지되려면 지혜와 용기, 절제의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고 설파했다. 그런데 천안함 사고를 보면 용기 있는 군인들은 있었는데 언론과 시민단체의 절제력은 부족했고 정부와 군에도 지혜로움이 충분치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지속가능한 민주공동체를 가꾸어가기 위해서는 지금이야말로 감정과 격정에 휘둘리는 이 저급한 ‘포퓰리즘’과 ‘감상주의’의 문제를 극복하고 자기 절제력을 갖춘 품위 있는 호국의식과 공동체의식을 어떻게 고양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때다.

박효종 (서울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 parkp@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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