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통합 칼럼
[국민통합 칼럼 시리즈 01] 외칠수록 멀어지는 ‘사회통합’
13. 2. 26.
1
신중섭
‘사회통합’은 우리 시대의 화두가 되었다.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여야 가릴 것 없이 사회통합위원회를 만들고 사회대통합을 정치의 제1과제로 삼겠다고 다짐했다. 이것은 우리 사회에서 ‘사회통합’이 시대적 과제가 되었음을 뜻한다. 권위주의를 동반한 산업화와 상대를 ‘惡’으로 규정한 민주화 세력이 우리 사회에 이념ㆍ계층ㆍ지역ㆍ세대ㆍ성ㆍ빈부의 갈등을 증폭시켰기 때문이다. 이러한 갈등으로 유발되는 사회적 비용이 대단히 높은 상황에서 사회통합은 과거와 현재의 상처를 치유하고, 미래의 위험을 예방하기 위해 피할 수 없는 과제이다.
일반적으로 사회통합은 “다양한 특성을 가진 구성원들이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을 갖고 공동의 비전을 공유하며 긍정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국민적 결집력”을 지칭한다. 이러한 사회통합은 “사회 질서에 대한 개인과 사회의 상호 공감, 사회적 배제 집단의 포용”에서 출발한다. 민주화와 정보화, 세계화가 급속도로 진전되는 현대 사회는 통합보다는 분열과 갈등의 요소를 더 많이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사회통합을 위한 노력은 더 필요하다.
사회통합은 공생적 사회질서의 전제조건으로 국가와 사회의 지속적인 발전에 필수적이다. 사회통합은 개인이 자신이 속한 국가와 사회에 대해 소속감을 갖고 국가와 사회 발전에 필요한 에너지를 발휘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하기 때문에, 사회 갈등이 높은 사회와 국가는 발전의 원동력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권이 주도하는 ‘사회대통합’ 담론이나 정책들은 통합이라는 원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은 고사하고 장ㆍ단기적으로 사회 갈등과 분열을 증폭시킬 우려를 담고 있다. 정치권의 통합 지향적 담론이나 정책은 기존의 질서를 부당한 것으로 간주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새로운 질서를 권력을 통해 이식하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현존하는 질서가 완전하거나 모두 정당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수정되고 개혁되어야 하지만, 개혁과 수정이 정치적 명분이나 슬로건으로 포장되면 오히려 부작용만 키운다.
이러한 사회통합 논의에서 몇 가지 고려할 사항을 살펴보자. 우선 ‘통합’이 고도의 추상적인 상태로 설정되어 있다는 점이 문제다. 추상적인 상태를 목표로 설정하면, 그것의 내용과 달성 방법에 대한 합의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사회통합에 대한 논의는 갈등이나 분열의 요인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방법에서 출발해야 한다.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이나 집단은 가치관이나 비전이 다르기 때문에 우리가 추구해야 할 추상적인 가치에 합의하기는 어렵지만, 제거해야 할 구체적인 악에 대해서는 합의하기 쉽기 때문이다. 사회통합은 ‘최대주의’가 아니라 ‘최소주의’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러므로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문제점을 해결한다는 차원에서 국가 정책을 논의해야 한다. ‘사회통합’과 같은 추상적인 이념을 국가 정책과 연결시키면 그 정책의 평가가 어려워진다. 소위 ‘사회통합’을 위해 필요하다고 말하는 ‘복지정책’, ‘경제민주화 정책’, ‘분권정책’, ‘인사정책’의 정당성을 ‘사회통합’에다 두면 그 정책 자체의 적합성ㆍ정당성을 평가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정책의 성공과 실패를 판별할 수도 없게 된다. 정책을 ‘사회통합’의 명분으로 사용하면 ‘갈등’은 어느 사회나 항상 존재하기 때문에 ‘사회통합’은 항상 불합리한 정책을 양산하게 되어 궁극적으로 ‘사회통합’을 저해하게 된다. 나아가 경제 성장 없는 복지 확대는 미래 세대의 재앙이 된다.
둘째, 사회의 갈등 요인에 대한 윤리적 판단을 하지 않아야 한다. 내가 추구하는 목적은 도덕적이고 다른 사람이 추구하는 목적은 비도덕적이거나 악하기 때문에 갈등이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갈등은 모든 집단이나 개인이 윤리적으로 정당한 이익이나 권리를 추구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상대방에게 양보나 배려를 요구하는 것은 갈등 해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만약 그렇게 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분열이나 갈등은 원초적으로 생성되지 않는다.
실제적으로 개인이나 집단은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고 목적을 달성하기를 원하는 이기적인 존재이다. 따라서 현실에서 이익의 충돌과 갈등이 발생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이런 상황에 우리가 대처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방법은 충돌과 갈등을 인정하고 그것을 합리적으로 해결하거나 약화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현재 정치권에서 논의하는 것과 같이 ‘사회대통합’의 기치를 걸고, ‘경제민주화’, ‘보편적 복지’, ‘탕평책’과 같은 정책을 통한 방법으로는 충돌과 갈등을 합리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오히려 증폭시킬 따름이다. 그리고 충돌이나 갈등은 ‘事前에 정해진 절차’에 따라 해결해야 한다.
셋째, ‘차이’를 인정하고 그것을 발전의 동인으로 삼아야 한다. ‘차이’는 ‘vision’이나 ‘idea’의 다름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자연스러운 상태이며 통합의 대상이 아니다. 따라서 ‘차이’에 대해 ‘갈등’이라는 ‘이름 붙이기’는 피해야 한다. 특히 언론이나 정치권은 20:80, 1:99, ‘부자 증세’ ‘부자 감세’와 같은 분열적 언어 사용을 자제해야 한다. 지난 대선의 결과를 놓고, 이념ㆍ지역ㆍ세대의 갈등의 표출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각각의 다름에 따라, 이념ㆍ지역ㆍ세대에 따라 다른 정치적 선택을 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해석해야 한다. 특정 개념을 통해 현실을 그렇게 규정하면 현실이 그렇게 이해된다. 선거를 통해 권력을 교체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항상 승자와 패자가 존재하기 마련이며, 성패는 ‘차이’에서 유래하는 것이므로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넷째, 현실적으로 정치는 개인이나 집단의 여러 형태의 이익을 정치적으로 조정하는 것을 자신의 목적 가운데 하나로 삼았는데, 이 ‘조정의 과정’은 제로섬이기 때문에, 항상 ‘갈등’을 내장하고 있다. 사회적 갈등을 최소화하려면 정부의 역할을 최소화해야 한다. 따라서 통합이 정치권의 의제가 아니라 민간 영역의 의제가 될 때 그 목적을 효과적으로 달성할 수 있다. 정부가 직접 통합을 주도할 것이 아니라 민간의 참여를 유도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지점에서 멈추어야 한다.
다섯째, 개인이나 집단은 자신이 속한 계층, 자신의 사회적 지위, 자신의 능력에 따라 세상을 달리 보게 마련이다. 이런 것을 넘어 “사람의 문제를 하나로 보게 하는 것은 윤리이다. 사랑과 화해와 용서와 관용,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하나의 생명에 대한 존중, 이러한 것들이 사람들을 하나가 되게 하고 사회를 통합한다.” 사회통합의 노력은 충돌과 갈등을 쉽게 유발할 수 있는 요소가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있는 보편적 인간의 윤리를 부각시키고 함양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이런 노력은 정부가 아니라 민간이 주도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마지막으로 ‘사회통합’에는 ‘배제의 논리’도 포함되어야 한다. 통합이라는 명분으로 모든 개인이나 집단을 용인할 수는 없다. 공동체의 역사ㆍ우리 체제의 정당성ㆍ헌법을 인정하지 않는 개인이나 집단은 통합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신중섭 (강원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 joongsop@kangwon.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