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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RI 지난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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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통합 칼럼

[국민통합 칼럼 시리즈 23] 사회통합을 위해 ‘사회적’일 필요는 없다

13. 5. 14.

전희경

요즘처럼 ‘사회적’이란 말을 자주 접했던 적이 있는가. 사회적 책임, 사회정의, 사회적 약자, 사회적 일자리, 사회적 기업, 사회적 권리 등 ‘사회적’인 무언가로 국가정책도, 언론도 포화상태에 이를 지경이다. 지난 이명박 정부의 사회통합 추진에 이어 박근혜 정부 역시 국민통합을 국정의 주요 목표로 삼으면서 당분간 ‘사회적’인 것들의 열풍은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사회적’이란 말이 갖는 평등지향 속성, 시장실패에 대한 처방전격 이미지는 사회갈등을 해소하거나 적어도 이를 위로할 수는 있는 매력적인 언어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적’인 정책들이 갖는 부작용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고 사회적 권리를 보장한다는 명분으로 행해지는 막대한 재정지출은 국가개입을 확대하고, 정부규모를 팽창시키는 것은 물론 행정비용만 증대하고 실효는 거두지 못하는 비효율을 초래하기 일쑤였다. 사회적 기업과 사회적 일자리 같은 사업은 시장성에 기반을 두지 않는 태생적 한계로 지속가능하지 못할 뿐 아니라 민간에 구축효과를 가져오는 심각한 역기능을 초래한다.



답답한 것은 이런 엄연한 사실들 앞에서도 ‘사회적’이란 말이 갖는 강력한 힘(예를 들면 공동선의 추구, 비용의 타인 전가, 자기책임 탈색 등) 때문에 이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은커녕 제대로 된 토론의 장조차 마련되기 어려운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정책에 대한 찬반이 선과 악의 범주로 옮겨가서야 누가 굳이 이 외롭고 고단한 길을 걸으려 할까.



대한민국이 전후의 폐허를 극복하고 세계의 선진국과 순위를 다투는 경제강국이 될 수 있었던 저력은 ‘사회적’인 것이 아닌 ‘개인적’인 것에 있다. 창의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기업가정신을 바탕으로 기업을 일으키고, 어려운 여건에서도 교육을 통해 개개인의 경쟁력을 높인 것은 위대한 개인들이다. 자신의 삶과 가족의 삶을 스스로 지켜내겠다는 불굴의 의지가 모여 ‘한강의 기적’이 가능했던 것이지 애초에 ‘사회적’인 무언가를 위해 달려왔다면 오늘날의 성취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사회갈등은 어떤 면에서 다음 단계로의 도약을 위한 성장통이다. 주로 소득격차에서 촉발된 사회갈등의 해법은 결국 지속적 성장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복지확대도 필요한 재원이 있어야 가능하다. 어려운 이웃을 보듬는 기부와 자선도 개인의 자발적인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야 지속가능하다. 사회 구성원 개개인이 더 잘살고 더 힘있게 되어야 ‘사회’가 앞으로 나갈 수 있고 이런 사회에서 타인에 대한 포용과 관용의 힘이 생긴다. 이것이야 말로 사회통합의 원동력이다.



사회통합을 위해서 ‘사회적’일 필요는 없다. 오히려 지금 대한민국은 다시 ‘개인’에 집중해야 한다. 박근혜 정부의 국민통합의 방향은 대한민국에 또 한 번 기업가정신이 넘쳐흐르게 하고, 청년들이 ‘사회’라는 실체 없는 허상에 기대지 않도록 하는데 있어야 한다. 국가가 ‘사회’라는 이름 뒤에 숨고, ‘사회적’이라는 미명을 무기삼아 실패할 것이 명약관화한 정책을 밀어붙여서는 또 다른 사회갈등을 촉발할 뿐 국민통합은 요원하다. 개인들이 강한 나라에 ‘사회통합’은 선물처럼 찾아온다. 



전희경 (한국경제연구원 사회통합센터 정책팀장, hkjun@keri.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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