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2004년 정부 예산편성 이대로 좋은가
08. 4.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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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실
우리 민족의 반만년 역사 중 백성들이 편안한 때는 별로 없었던 듯하다. 우리 국민들은 항상 혼란스러운 가운데 고단한 삶을 이어가야 했다. 최근에도 이런 국민들의 불편한 삶은 계속되고 있다. 대통령이 특검을 거부한데에 이어 한나라당은 최병렬 대표가 특검 거부에 대해 철회를 요구하며 단식농성에 돌입했고 국회의원들은 국회등원을 거부하고 장외투쟁에 나서기로 하는 등 국정의 혼란은 이미 도를 넘었다. 이런 와중에서 우려했던 바대로 결국 예산안 심의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표류하고 있다. 이 상태로 간다면 법정시한인 12월2일까지 예산안을 처리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고 한다 해도 졸속처리가 불가피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국회의 각 상임위에서 일반회계기준 117.5조원의 예산안을 7조원이나 증액시켜서 예결특위에 넘겼을 때부터 제대로 된 심의를 기대한 것 자체가 잘못이었다는 생각마저 든다. 각 당이 중복성이나 선심성 예산은 철저히 찾아내 삭감해야 한다는 국회 본연의 정신을 기대하는 것은 고사하고 국회의원들은 지난 주 열렸던 예결위에서도 예산을 심의하기보다는 총선을 의식해 지역현안을 챙기기에 급급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나라당이 50명의 예산결산위원회의 과반수를 넘는 27명을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나라당이 등원을 거부하면 예산안 심의는 물 건너 간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다 보니 내년도 정부의 살림살이 계획인 정부예산안에 대한 국회 심의는 공중에 떠버린 격이 되었다.
여기에 정부는 정부대로 한 술 더 떠서 균형기조의 2004년 예산을 내놓고 두 달밖에 안되었는데 벌써부터 솔솔 적자예산을 편성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액수도 구체적이다. 김진표 부총리는 지난 11월 20일 국회예결위 답변에서 내년도에 5%대의 성장을 하기 위해서는 3조원 정도의 예산을 증액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IMF의 적자예산 편성 권고가 나오자 각 당과 정부는 기다렸다는 듯이 사용내역을 밝히고 있다. 김 부총리는 동북아 경제중심건설을 위한 SOC투자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고 밝힌 반면 각 당은 나름대로 농어촌 달래기 등 다른 용도를 이야기하고 있는 듯하다. 정말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물부터 마시는 격이다.
우리경제의 내수와 투자가 좀처럼 살아나지 않고 있다고 하나 이 역시 작년 그리고 올해에 이어 카드사 문제와 더불어 신용불량자 문제가 불거질 때 이미 예견되었다. 어제 발표된 미국의 3/4분기 경제성장률은 당초 예상치인 7.2%를 1%p나 뛰어 넘어 8.2%에 달했다고 한다. 아직 단언하기는 이르나 예상보다 미국경제가 빠르게 회복되고 있다. 중국경제를 비롯한 유럽경제도 높은 경제성장을 이어가고 있다. 이에 발맞추어 우리의 수출도 호조를 보이고 있다. 3조원의 예산 증액이 경기를 어느 정도나 진작시킬지도 의문이지만 적자재정이냐 균형재정이냐의 문제를 떠나 정부가 적어도 1년 살림살이를 짤 때는 신중해야 한다. 외환위기 이후 매년 한 두 차례 이상의 추경예산을 짜는 것이 거의 관례화되어 있음을 감안하면 어차피 또 추경예산을 편성해야 한다면 지금 증액예산을 편성하는 것이 낫다고 주장하는 것은 국민의 혈세를 쓰는 자세가 아니다.
무엇보다 정부가 예산을 편성해서 내놓은 지 두 달 밖에 되지 않았다. 경기회복이 예상보다 늦어서 당초 균형예산을 편성할 때 생각했던 5.5%의 내년도 경제성장률이 달성하기 어렵다고 하는데 이러한 상황 변화는 두 달 전에 충분히 예상되었던 것이기 때문에 핑계거리도 되지 않는다. 예산안을 짤 때 고려하지 않았던 이라크 파병과 시장개방에 따르는 농촌지원 등 지출요인이 늘었다고 정부는 변명을 하고 있지만 이러한 요인 역시 모두 연초부터 예상되었던 것들이다. 그리고 두 달 만에 경제상황이 바뀌었다고 뒤집어야 할 예산 편성이라면 그 예산을 짠 정부 담당자는 문책감이라고 생각된다.
더구나 정작 가장 심각한 문제는 예산 증액 이야기가 기획예산처가 아닌 재경부가 열린 우리당 등 정당과 함께 증액 필요성을 제기했다는 점이다. 백번 양보해서 정말 예산 증액이 필요하다면 사유를 정당하고 설득력있게 달아서 수정예산을 편성해야 할 것이다. 수정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할 의사도 없으면서 재경부가 나서서 증액의 필요성을 논의하는 것은 헌법 정신을 무시하고 국민을 기만하는 행위다. 국회나 행정부 모두 지금 늘리려고 하는 예산이 국민들의 고단한 삶의 대가 중 일부를 국가를 위해 바친 세금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