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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RI 지난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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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칼럼

주변부의 경제학

08. 4.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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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거일

우리의 기억이 미치는 시절부터 경제는 우리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관심사였다. 어느 사회에서나 '먹고 사는 일'이 가장 중요하지만, 우리 사회가 안정적이지 못했던 터라, 우리 시민들의 경제에 대한 관심은 무척 클 수밖에 없었다. 자연히 경제학자들은 두드러진 역할을 맡았고 시민들로부터 '현자' 대접을 받아왔다. 경제 정책을 놓고 그들 사이에 벌어지는 논쟁들은 온 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사정이 그러하므로, 우리는 우리 사회에서 경제학이 활기찬 학문이리라고 기대하게 된다. 그러나 실정은 상당히 다르다. 경제이론에 관한 논의나 성찰은 드물고 경제정책에 대한 얘기들만 무성하다. 즉 이론에 대한 관심은 적고 이론의 응용에 대한 관심만 큰 것이다.


이처럼 이상한 사정은 대체로 두 가지 요인에서 나왔다. 하나는 경제학의 성격이다. 조운 로빈슨(Joan Robinson)의 지적대로 경제학은 아주 어렵지만 수학의 아름다움이나 자연과학이 내놓는 발견의 만족과 같은 지적 보답을 "이 거세고, 불안정하고, 제대로 길들여지지 않은 주제(this scrappy, uncertain, ill-disciplined subject)"를 다루는 사람들은 바랄 수 없다. 그래서 정책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는 데 도움이 되리라는 기대가 아니었으면 경제학은 애초에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또 하나의 요인은 우리 사회가 주변부라는 사정이다. 지금 하나로 통합된 인류 문명의 중심부는 미국과 서유럽인데, 그 중심부와 주변부 사이엔 아주 가파른 '지식의 물매(gradient of knowledge)'가 있다. 그래서 중심부의 지식들은 거세게 주변부로 몰려온다. 그런 상황에선 창조적 작업이 무척 어렵다. 필요한 정보들을 얻기가 어려운 데다가 재발견의 위험도 크므로, 중심부의 작업들을 수용하거나 아예 중심부에 가서 작업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게다가 그런 사정은 주변부 사회가 자신의 준거틀을 지니는 것을 막는다. 자연히 주변부 사회는 사물에 대해서 독자적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중심부에 먼저 조회하고 그곳의 기준을 얻어서 평가한다. 어쩌다 창조적 작업이 나오더라도 선뜻 인정받지 못한다. 그것을 평가할 만한 사람들이 적은데다가 평가자들도 평가에 필요한 정보들을 얻기가 워낙 어렵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평가자들은 자신들의 무지가 드러나는 것을 겁내게 되어, 처음 보는 작업들을 아예 외면하거나 비현실적으로 높은 수준을 평가기준으로 내놓는다. 우리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한 창조적 작업이 외국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경우가 흔한 것은 그런 사정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경제이론에 관한 논의와 성찰이 드문 것은 그래서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자연스러운 것이 늘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경제정책의 설계와 집행에서 경제학 이론의 기계적 적용은 큰 실패의 위험을 진다.


이론은 실재의 모형이다. 자연히 이론은 단순화를 포함한다. 경제학이 사람의 행태를 대상으로 삼으므로, 경제학 모형의 핵심은 사람의 모형이다. 경제학자들은 그런 모형을 '경제인(homo economics)'이라 부른다. 사람은 지구 위에서, 어쩌면 온 우주에서, 가장 복잡한 체계다. 자연히 경제인은 실재하는 사람을 극도로 단순화한 모형이다.


근년에 경제학에서 나온 주요 업적들 가운데 여럿이 경제인에 새로운 특질을 도입하는 연구들이었다는 사실은 그래서 놀랍지 않다. 그런 업적들 가운데 두드러진 것은 허버트 사이먼(Herbert Simon)의 '제약된 합리성(bounded rationality)'이다. 경제인을 보다 정교하고 사실적으로 만드는 작업은 본질적으로 생물학과 심리학의 성과들을 빌려오는 일이다. 2003년에 행태주의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Daniel Kahneman)이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것은 이런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가리킨다.


경제인을 보다 정교하고 사실적인 모형으로 만드는 일엔 그러나 문제가 따른다. 모형은 그것이 단순하다는 사실 덕분에 쓸모가 있다. 단순화를 통해서 두드러진 특질들에 초점을 맞추지 않으면, 우리는 복잡한 현상을 분석할 수 없다. 누가 축척이 1대 1인 지도를 찾는가? 그래서 모형이 단순할수록, 그것의 설명력은 커진다. 이 역설은 본질적이어서 아무리 경제학이 발전하더라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경제학자들은 경제학 이론을 기계적으로 현실에 적용하는 대신 경제인이라는 개념을 실재하는 사람에 보다 가깝도록 마음속에서 미묘하게 변용한 뒤에 경제학 이론을 다루어야 한다. 성공적 경제학자의 비결이 있다면 이것이 바로 그 비결이다.


경제학과 경제정책에서 아울러 두드러진 업적을 남긴 케인스는 바로 그 점을 강조했다. 그의 경제철학에서 중심적인 사실은 사람들의 삶이 무척 불확실하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모든 경제주체들은 미래에 대한 불완전한 지식만을 가졌고, 당연히 그들은 그런 사정에 대해 합리적으로 대응하려고 애쓰게 마련이라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경제활동에서 그런 대응의 핵심은 예상치 못한 일들에 대비해서 현금을 확보하는 것이고, 그래서 그는 화폐의 가치 저장 수단으로서의 기능을 강조했다. 경제인에 대한 이런 통찰은 이전의 거친 모형과 뚜렷이 대조된다.


보다 일반적으로 모든 사회과학 이론들은 사람의 모형에 바탕을 두었다. 그래서 그런 이론들의 우열은 궁극적으로 그것이 바탕으로 삼은 사람의 모형의 정확성에 달렸다. 인류에게 큰 고통을 안긴 모든 사회적 실험들은 프랑스 혁명의 공포정치, 공산주의 체제, 그리고 국가사회주의 체제는 틀린 사람의 모형에 바탕을 두었다. 그런 재앙들을 불러온 사람들은 사람을 그저 더 큰 집단의 부분들로 여겼다. 그러나 사람은 역사의 법칙들을 드러내는 꼭두각시들도, 계급을 이루는 얼굴 없는 구성원들도 아니다. 사람은 모두 나름으로 독특하며 자유의지를 지녔고 수십억 년 동안 다듬어진 생존 기술들을 물려받았다.

비록 훨씬 덜한 정도이지만, 같은 비판이 전 정권과 현 정권이 '개혁'이라는 구호 아래 추진해온 경제정책들에도 적용될 수 있다. 그것들을 대하면, 우리는 이내 기계적 인간관의 냄새를 맡게 된다. 그것들은 사람들이 정부의 정책들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존재들이라고 상정한다. 그러나 사람은 결코 수동적이지 않다. 특히 자신의 경제적 이해가 걸린 일들에선. 그래서 그 정책들에서 온갖 '의도되지 않는 결과들'이 나왔다.

튼튼한 이론과 그 이론의 섬세한 해석이 없이 좋은 정책이 나오기는 어렵다. 경제에선 특히 그렇다. 우리사회에서 경제학의 이론적 측면에 대한 논의와 성찰이 부족하고 모두 경제정책의 설계와 집행에 매달린다는 사정은 건전하지 못하다. 주변부에서 창조적 업적을 이루기는 무척 힘들지만, 그런 사정이 경제학에 대한 논의와 성찰을 게을리하는 것을 정당화하진 않는다.

복거일 (소설가, 칼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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