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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RI 지난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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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칼럼

전통 캐롤의 독점적 시장지배력

08. 4.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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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학

금년 크리스마스에도 캐롤은 변함없이 경쾌하게 울린다. 작년에는 쓰나미가 동남아를 휩쓸면서 전 세계를 슬픔과 충격으로 몰고 간 와중에 크리스마스를 맞이했고 금년에는 줄기세포 연구에 관한 한국발 진실게임이 세계적 논란거리가 된 가운데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는 등 인간사 언제나 뒤숭숭하다. 세태는 여전히 혼란스럽고 날씨는 유난히 춥고 폭설피해가 서해안 지역을 강타한 가운데 맞이한 올해 크리스마스이지만 크리스마스는 역시 성탄 축제일이다. 하느님의 사랑을 자기희생으로 구현한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고 서로 은총의 인사를 나누는 복된 날이다. 그리고 캐롤은 언제나 그래왔듯이 성스럽고 즐거운 성탄절의 축제 분위기를 한껏 돋워주는 매개자 역할을 한다. 게다가 이들 캐롤은 어릴 적부터 들어왔기에 귀에 익고 종파를 초월하여 정겹게 느껴지기도 하다.


우리는 매년 크리스마스 때마다 같은 곡의 캐롤을 방송에서, 카페에서 그리고 길에서 만나게 된다. 왜 캐롤은 우리가 어릴 적에 들었던 그 메뉴에서 크게 바뀌지 않았을까? 사실, 우리가 흔히 듣는 캐롤은 19세기 이전에 만들어진 것들이 대부분이다. 오늘날 애창되는 캐롤은 1871년 ‘존 스테이너’ 박사가 정리한 70여 편의 곡들을 포함하여 19세기 이전의 것들이 주종을 이룬다. 지난 20세기에도 새로운 캐롤을 만들어 전파하기 위한 노력이 끊임없이 진행되었을 터이다. 그 결과 ‘White Christmas', 'Winter Wonderland', 'Jingle Bell Rock' 등 대중의 맘을 사로잡는 노래도 등장하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20세기 들어 캐롤 메뉴에 성공적으로 진입한 신곡의 수는 대단히 적은 게 사실이다. 게다가 캐롤을 크리스마스에 즈음하여 기쁜 맘으로 흥겹게 부르는 노래를 통칭하는 게 아니라 종교적인 색채가 가미된 캐롤 성가(聖歌)로 좁게 정의한다면, 위의 세 곡 역시 전통적인 캐롤 성가의 반열에 든다고 보기 어렵다. 20세기 들어와 캐롤 성가에 추가된 신곡의 수는 한손으로 꼽을 만큼 더욱 적다고 한다.


전통적인 캐롤이 세기를 뛰어 넘어 장구한 시장지배력을 갖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새로운 곡이 전통적인 캐롤 메뉴에 성공적으로 진입하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에 비유될 만큼 어렵다는데 그 원인은 무엇일까? 우리가 매년 비슷비슷한 캐롤을 반복적으로 듣게 되는 까닭을 공급과 수요 측면으로 나누어 생각해보면, 먼저 공급 측면에서는 별 문제 없어 보인다. 20세기 들어와 음악가들이 캐롤 만들기(공급노력)를 소홀히 한 것은 결코 아니다. 캐롤 산업은 전통 성가와 달리 종교와 인종을 넘어 전 세계인들이 즐겨 듣기 때문에 한 곡만이라도 성공하면 엄청난 부와 명예를 거머쥘 수 있는 시장이다. 이러한 이유로 지난 세기에도 많은 음악가들은 전통적인 캐롤 메뉴에 자신의 곡을 올리고자 노력을 기울였고 21세기인 지금에도 음악가의 그러한 꿈과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일부에서는 서정적이면서도 서사적인 이미지를 응축하고 단순하면서도 흥겹고, 현대적이면서 종교적인 노래, 즉 캐롤을 만드는 일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한다. 아름답고 완성도 높은 기존의 캐롤에 비견되거나 그 보다 더 나은 노래를 만드는 일은 분명 쉬운 일은 아닐 게다. 그러나 천재적인 음악가는 어느 시대에나 존재하고 성공할 확률이 낮은 만큼 성공하면 대박의 보상이 따르기 때문에 이들 음악가들이 새로운 캐롤을 만들어 성공시키고픈 인센티브는 충분하다. 이러한 유인 구조 하에 성탄절 음악용으로 수천 개의 음악이 작곡되고 존재하지만 우리가 즐겨 듣는 캐롤은 여전히 제한적이고 반복적이다. 왜 그런가?


전통 캐롤이 새로운 노래의 도전에도 불구하고 독점적 시장지배력을 유지하는 것은 아무래도 공급보다 수요 측면에 근본적인 이유가 있는 듯 보인다. 사람들은 캐롤 선호에 있어서 강한 역사적 경로의존성향(historical path-dependence)을 보인다. 마치 부부 또는 연인들이 자신들의 반려를 처음 만난 날짜와 장소, 분위기를 기억하고 반추하듯이 사람들은 어렸을 적 인상적이었던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좋은 추억으로 간직하고 반추하는 경향이 있다. 과거는 현재보다 늘 아름답게 보이는 법이며, 어른이 되어 산타의 존재와 산타가 보낸 선물의 비밀을 알아도 유년기에 가족과 함께 보냈던 그 크리스마스는 언제나 재현하고픈 행복이다. 세월이 흘러 가족의 구성이 바뀌고 자신의 역할이 ‘기대하는 자’에서 ‘준비하는 자’로 바뀌었어도 어린 시절의 행복한 그 분위기와 그 음악은 늘 그리운 까닭에 어제의 캐롤을 오늘 되듣고 싶어하는 정서적 회귀성이 작동하는 건 인지상정이리라. 이와 같이 어린 시절 경험했던 행복(캐롤)을 오늘 재현하고픈 정서적 회귀성이 세대를 유전한다는 바로 이 점이 전통 캐롤의 독점적인 시장지배력(market power)이 지속되는 까닭을 잘 설명하고 있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필자의 위 추측이 맞다면 캐롤 선호에 있어서 강한 역사적 경로의존성은 기존의 경로의존성 문헌에 새로운 이슈를 추가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경로의존성에 관한 지금까지의 논의는 대체로 지난 번 에세이에서 인용했던 QWERTY처럼 수평적인 망외부효과(network externality) 및 소비자전환비용(consumer switching costs)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전통 캐롤의 경로의존성은 ‘수평적인 망외부효과’와는 사뭇 다른 ‘정서적 회귀성의 세대간 유전’에 기인한다는 점에서 경로의존성의 발생 원인에 대한 사례 연구를 확장해봄직 하다. 우리나라의 이와 비슷한 사례로는 명절교체 실험이 있다. 효율을 강조하던 3공 시절 새해 명절인 설날을 매해 1월 1일(신정)로 바꾸고 우리의 전통 명절인 구정 과세(過歲)를 인위적으로 금압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설날 문화 또한 정서적 회귀성의 세대간 유전에서 유래하기 때문에 인위적인 명절 교체의 정책실험은 실패하게 된다. 당시 정부의 서슬퍼런 금압조처에 대해 사람들은 이중과세(二重過歲)로 대응하는 등의 부작용이 생기자, 정책실험을 중단하고 구정을 전통 명절로 부활시켰던 것이다.


끝으로 경로의존성에 관한 논의는 자칫 ‘시장실패(market failure)’ 논의로 흐르는 경향이 있는데 이 점은 별도의 주의가 필요하다. 캐롤 선호에 있어서 역사적 경로의존성이 강하고 전통 캐롤의 독점적 시장지배력이 강해서 미학적으로 충분히 의미있는 새로운 곡이 캐롤시장에서 생존하지 못한다고 해서 캐롤시장에 시장실패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오류이다. 새것이 기존의 것에 비해 기능적으로 또는 미학적으로 뛰어나다 해도 소비자 입장에서 보면 옛것에서 새것으로 바꾸고 적응하는 데는 별도의 시간과 노력 등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경로의존성으로 인해 시장실패가 발생한다고 주장하려면 바로 이와 같은 소비자 전환비용까지 감안해서 새것이 옛것에 비해 경쟁력이 있는지를 따져봐야 하는데, 아직까지는 소비자 전환비용을 감안해도 경쟁력 있는 새것이 옛것을 대체하지 못했다는 사례는 필자의 과문 탓인지 아직 알려진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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