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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RI 지난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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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칼럼

본고사와 고교등급제, 왜 필요한가

08. 4.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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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용

우리 사회의 저변에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는 가치 중의 하나가 ‘평등’이다. 비단 우리 사회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현상이기는 하지만, 유독 우리 사회에서 평등은 다른 어떤 가치보다 소중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평등의식은 상업세계에서는 ‘경제력집중 억제’로, 교육계에서는 '평준화'로 구체화되어 있다.


자유시장에서 경쟁을 통해 형성되는 결과를 존중하면 개인의 능력과 특기를 바탕으로 실력있는 인적 자원이 형성됨은 물론, 개인간 평등도 상당 정도 달성될 수 있다. 자유경쟁은 개인의 선택의 자유를 보장하고 비교우위에 입각한 분업과 협동을 통해 모두를 최적의 위치에 배분함으로써 '윈-윈'의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즉, 자유를 추구하면 자유와 평등을 함께 달성할 수 있다. 그러나 국가가 개입하여 평등을 추구하면, 이는 필히 선택의 자유를 제한하고 시장의 작동을 억압하여 결국 자유를 훼손함은 물론 평등도 이룩할 수 없다. 물론 여기서의 평등은 수평적 평등을 의미한다.


국가가 교육에 개입하는 배경에는 교육은 일반상품과는 다르므로 시장에 맡길 수 없는 특수한 것이라는 개념이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개념은 흔히 교육은 공공성을 가지며, 따라서 모든 사람들에게 동등한 기회를 부여해야 한다는 이른바 ‘기회의 평등’이라는 믿음이 뒷받침되고 있다. 그러나 교육의 공공성은 초등학교 수준에서 배우는 읽고(Reading) 쓰고(wRiting) 셈하는(aRithmetic), 이른바 3R 교육에서나 찾을 수 있다. 그 이상의 고등교육은 모두 자신의 생산성 향상을 위한 것이며 공공성과는 거리가 멀다. 설령 고등교육의 공공성을 일부 인정하더라도 ‘공공’을 ‘국가’와 동일시하고, 더 나아가 ‘공익’과 동일시하는 개념은 잘못된 것이다. ‘국·공립’이 ‘공공’을 위한다는 보장은 없으며, 따라서 학교 교육에 있어 사립학교가 국·공립학교보다 공공성에서 뒤떨어진다고 말할 근거도 없다. 교육이 공공성을 가진다는 개념은 이처럼 취약하다.


또한 기회의 평등이라는 개념도 따지고 보면 내용없는 껍데기라는 사실이 곧 드러난다. 사람들이 가치를 부여하는 대상과 방법은 다르기 때문이다. 좋은 교육기회에 가치를 부여하지 않거나 흥미를 가지지 못하는 사람까지 포함하여 모두에게 그러한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희소한 자원의 낭비를 초래할 뿐이다. 사회는 다양한 가치와 취미, 그리고 특기 등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사는 집합체다. 이러한 다양성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모두에게 똑같은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가치와 취미, 특기 등을 실현할 수 있는 다양한 교육상품의 출현을 장려하여 선택의 폭을 넓혀주는 것이다.


교육부가 대학입시와 관련하여 허용하지 않겠다는 이른바 ‘3불 원칙’ 중 본고사 부활과 고교등급제 불가 원칙도, 교육은 특별한 것이며 공공성이 있기 때문에 모두에게 동일한 기회를 부여해야 한다는 평등 이념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개인간, 대학간 그리고 고등학교간에 존재하는 ‘차이’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일 뿐, 이유없는 ‘차별’을 금지한다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리고 그러한 차이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데 대한 합당한 이유도 명쾌하게 제시된 바가 없다. 고작해야 과외교습의 과열을 막겠다는 것을 이유로 제시하고 있으나, 이는 원인과 결과가 뒤바뀐 진단이다. 획일화된 좁은 틀 속에서 모든 학생들로 하여금 똑같은 특성을 가진 대학 진학을 향한 경쟁에 몰두하게 함으로써, 분업과 협동을 통한 양합(陽合)의 게임이 아니라 영합(零合)의 게임에서 과외교습이 더 치열해지는 결과를 낳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대학 본고사를 금지하고 연 1회 실시하는 수학능력시험 평가에 의해 신입생을 선발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각 대학의 특성과 의지에 맞춘 주관적인 기준에 따라 신입생을 선발할 수 있는 자유를 박탈하고 획일을 강요하는 것이다.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투명성과 사실상 존재 불가능한 '객관적 기준'이라는 이름 아래 모든 대학의 신입생 선발기준을 획일화함으로써 정부가 추구하는 소비자 위주의 교육, 특성있고 경쟁력있는 대학 육성이라는 목표에 정면으로 어긋나는 것이다.

국가 주도의 획일화된 교육의 결과가 어떠했는지는 지금까지의 실험으로 충분히 알 수 있다. 이제 더 실험할 수 있는 여지가 남아 있는지도 의심스럽다. 세월이 바뀌면 똑같은 메뉴판에서 특정 방법을 선택하여 반복적으로 적용하는 것 외에는 정부가 이제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결국 국가 주도 교육은 개인의 선택의 자유를 대폭 제한함으로써 창의적인 사고와 경쟁력을 가진 인적 자원이 형성될 수 있는 길을 원천적으로 봉쇄해 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평준화 정책으로 인한 학생들의 학력 저하 추세, 꾸준한 해외유학생 증가 추세, 그리고 아직까지도 대부분의 고급인력을 외국에 의존하고 있는 현실이 우리 교육의 낙후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한국교육을 살리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교육은 특별한 공공의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국가 주도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인식과 ‘국가’는 곧 ‘공공’, 또는 ‘선(善)’이라는 잘못된 인식에서 깨어나야 한다. 교육이 국가 주도가 아닌 민간 주도로 이행할 경우 다양한 교육상품을 공급할 수 있는 여러가지 학교가 출현할 것이며, 교육소비자는 자신의 능력과 기호에 맞는 학교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획득하게 될 것이다. 그 결과 교육계는 영합의 게임이 아닌 양합의 게임 세계로 옮겨갈 것이다. 이는 지금까지 국가 주도 교육의 결과 피폐해진 교육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등록금을 부과하는 등 민영화의 길을 검토하고 있는 독일에서도 얻을 수 있는 교훈이다. 지식강국을 건설하고자 한다면 교육의 자율화 이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교육인적자원부가 본고사 부활과 고교등급제를 불허함으로써 개인간, 대학간, 고등학교간에 존재하는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한, 한국교육의 경쟁력은 높아질 수 없다. 학교는 일차적으로 교육서비스를 생산하는 기업이다. 서비스의 품질을 높이는 방법은 교육시장에서 학교간 경쟁을 촉진하는 것이다.

김영용 (전남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yykim@chonnam.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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