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중장기비전, 왜 필요한가?
08. 5.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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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희
지난해 한국경제가 창출한 부가가치(GDP)규모는 6801억불에 달했다. 교역조건의 악화에도 불구하고 일인당 소득(GNI)은 1만4000불 수준을 넘어섰다. 이는 외환위기 전년인 1996년이나 지난해에 기록했던 1만2000불 수준을 크게 상회하는 것이다. 현재의 환율과 성장추이를 감안할 때, 올해 일인당 소득은 1만6000불을 무난히 넘어설 것이라는 전망을 가능케 한다. 한국경제가 외환위기의 충격에서 벗어나 정상적 성장경로에 복귀했다고 판단할 수 있는 대목이다. 물론 여전히 부문간 성장격차와 취약계층의 문제 등 성장을 제약하는 구조적 요인들이 적지 않지만 환란의 후폭풍 속에서도 한국경제는 좁은 보폭으로나마 꾸준히 전진해 온 것이다. 이제 한국경제는 세계 11위의 경제대국으로서 G10 진입을 목전에 두고 있으며 무역규모에서는 세계 8대 무역국을 지향하고 있다.
그럼에도 국제사회에서 한국과 한국경제에 대한 가시성은 그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물론 GDP규모나 무역규모가 국가간 자리매김을 위한 비교지표의 전부가 될 수는 없으며 국력신장에 대한 외부적 평가에 일희일비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구소련의 붕괴로, 냉전체제에 기반한 양극체제의 한 축이 무너진 후 형성되어 온 단일 초강대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질서는 이미 FTA를 근간으로 한 지역주의와 다극체제가 혼재된 양상을 띠어가고 있으며 이에 따라 지역주의의 확대와 다자주의의 진전은 상호보완적인 발전을 지속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변화로 인해 각국의 역내역할에 대한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고 있으며 역내역할 선점을 위한 각국간 경쟁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특히 근세이래 열강의 교두보이자 완충지대로서 기능해왔던 한반도를 둘러싼 지경학적 중요성과 긴장도는 최근 더욱 가중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를 배경으로 참여정부 출범이래 한국은 ‘동북아 평화?번영’을 위한 조정자 역할을 자임하고 있다. 그러나 GDP를 기준으로 할 때, 동 지역의 핵심국인 일본에 비해 1/5, 중국에 비해 1/2에 불과한 경제규모를 가지고 있으며 연평균 경제성장률 8%의 속도로 소득4배가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중국이나 오랜 침체에서 벗어나 성장궤도에 재진입하고 있는 일본에 비추어, 한국이 역내 조정자 역할을 뒷받침할 만한 실질적인 국가 비전은 제시되고 있지 않다고 할 것이다. 더욱이 경제의 각 부문뿐 아니라 국가의 각 부문간 불균형과 갈등구조의 심화로 시너지효과를 극대화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에 무력한 실정이다. 이는 한국경제, 나아가 국가적 차원에서 국력신장을 위한 뚜렷한 중장기비전이 제시되지 않은 채 부문별 계획에 치중하고 단기적 성과에 집착한 결과로도 비추어질 수 있다.
'90년대 많은 국가들이 2020년을 시계로 한 비전과 전략을 작성하여 제시한 바 있다. 아시아지역만 하더라도 선진국 진입을 위한 구상이라고 할 말레이시아의 'Vision 2020’, 단순한 경제대국에서 벗어나 성숙한 국가의 모습을 그린 일본의 ‘매력있는 일본’ 등을 통해 국민적인 합의기반을 마련해왔다. 이에 더하여 일본은 최근 2030년을 시계로 하는 ‘일본21세기 비전’을 내각부 주도로 작성했다. 문화창조 국가, 여유로운 생활, 작은 정부 실현을 골자로 하는 동 보고서는 의회의 채택을 앞두고 있다.
돌이켜보건대 우리나라는 YS정부들어 과거 정부가 60년대 이래 지속해 온 경제(사회)개발5개년을 종식시키고 신경제5개년계획을 수립한 바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것이 과거 개발연대 이후 고도성장을 지지해 온 정부주도 유도형 경제계획(indicative economic plan)의 마지막이었다고 할 수 있다. 5개년계획의 종언과 외환위기의 발발은 결코 인과관계로 파악할 수는 없겠으나 시기적으로는 연장선상에 있다.
더욱이 한국경제는 외환위기 발발로 21세기에 대한 준비에 소홀했던 측면이 있다. 물론 외환위기 극복과정에서 추진된 글로벌스탠더드의 도입과 각 부문의 개혁적 제도개선 등이 미래에 대비한 효율적 실천적 대안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름대로의 경제발전을 위한 전략수립과 실천보다는 국제통화기금 처방(IMF Recipe)으로 상징되는 다양한 부문의 개혁과제를 설계된 경로를 따라 체질을 바꾸어 가는 데에 주력해야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1980년 이후 유지하고 있는 대통령 단임제도 중장기적 국가운영을 제약하는 요소가 되고 있다. 5년 임기 내에 무언가를 이루어 업적으로 남겨야 한다는 강박감이 작용할 수 있다. 앞선 정권과의 차별화는 일관성 상실로 이어질 수도 있다. 이미 다섯 차례에 걸쳐 5년 단임의 대통령을 선출하고 국가운영을 위임한 기간동안 제기된 단점과 비용에도 불구하고 과거 장기집권의 폐해와 비교하거나 새로운 제도의 도입을 위한 국민적 합의를 모으는 일에는 관심이 적었다.
그런 의미에서 20세기 후반, 30여년에 걸친 압축성장 그리고 환란극복과정을 통해 선진경제에 더욱 접근하고 있는 한국경제가 세계 속의 미래위상이나 경제성장과 가치체계의 정립에 대한 국민적 합의없이 한 단계 성숙한 경제나 지속적 ‘삶의 질’ 개선을 이룩하기 위한 전략적 경제운영 그리고 국력신장을 위한 국가운영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현재 잠재력을 재평가하고 한국경제의 미래위상을 정립하는 한편 중장기적 관점에서 국가비전과 전략을 설정하고 이에 접근하려는 노력이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다고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