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재산권으로서의 주식의결권
08. 4.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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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광석
정부와 여당 측과 재계와 야당 측의 논쟁이 치열한 국민연금법 개정안과 공정거래법 개정안이 현재 국회의결을 기다리고 있다. 국민연금법에서는 국민연금의 주식투자 및 공공투자의 허용문제와 아울러 국민연금의 주식의결권 행사가 중요한 현안으로 떠올랐으며, 공정거래법에서 재벌계열 금융회사의 주식의결권 행사문제가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 정부는 국민연금의 수익성을 위해서는 의결권행사가 당연하지만 금융계열사의 의결권은 대기업집단의 구조개혁을 위한 연장선상에서 제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와는 달리 재계와 야당은 국민연금이 의결권행사를 한다면 정부가 기업을 지배하는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고 우려하면서 금융회사의 수익성을 높이기 위해선 금융회사가 적극적으로 주식의결권을 행사해야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그러나 외국자본의 적대적 인수합병에 대해 민감한 기업은 경영권방어를 위해 국민연금의 의결권행사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있는 형편이다.
각 계의 입장을 관찰해 보면 자신이 지배할 수 있는 기관이 주식의결권을 행사하는 것에 대해서는 찬성하는 한편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의결권행사를 반대하는 입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처럼 우리나라 경제제도를 합리적으로 결정하기보다는 각각의 이해관계에 따라 결정하는 것은 우리나라 경제제도의 지속성과 경제발전을 저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국민연금과 재벌계열 금융회사의 의결권행사에 대한 제도 역시 합리적인 논리에 기반을 두고 결정되어야 할 것이다.
자본주의 경제제도에서 주식의결권은 주요 재산권 중 하나이다. 개인이 주식을 소유하고 그 소유분에 해당하는 의결권을 행사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의가 있을 수 없으나, 개인이 자금을 금융회사에 신탁하는 경우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투자자가 신탁한 자금을 주식에 투자하여 얻게 된 주식의결권 -투자자의 재산권▸ 을 금융회사가 자의적으로 행사하는 것에 대한 해석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경우는 개인이 투자할 금융회사를 자율적으로 선택함으로써 자기자금의 잠재적 의결권도 그 금융회사에 부여한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만약 신탁된 의결권이 잘못 행사되어 신탁자금의 수익성을 저해했다고 판단되면 개인은 자신의 자금을 다른 금융회사로 이전할 유인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금융회사에 신탁된 주식의결권이 행사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정부는 계열금융사의 보유 주식으로 의결권을 행사하는 것을 불특정 다수 고객의 자금으로 계열사 경영권을 보호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금융계열사의 의결권 행사 범위를 15%로 강화하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국내 상장주식의 40% 이상을 외국인이 보유하고 있고, 투자자들이 항상 자본을 회수할 수 있는 자본시장에서 신탁자산의 수익성을 담보로 계열사 경영권을 보호하는 데 주력할 정도로 금융회사들이 여유를 갖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또, 금융계열사가 자기 계열사의 지배를 목적으로 한 주식보유로 인해 금융사 주주의 이익을 침해하고 있다면 주주대표소송을 통해 그 책임을 물을 수 있으며 투자자의 자율에 의해 투자자금을 회수할 수도 있다. 실증적으로도 최근의 생명보험회사의 지급여력비율과 자산운용수익율의 경우에 오히려 대기업집단 계열 보험사들이 다른 보험사들보다 더 높게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고려할 때, 금융계열사가 계열사의 경영권 방어만을 위해 전용되고 있다는 정부의 주장은 실증적인 논거가 없는 단순한 주장일 뿐이다. 금융계열사의 의결권 제한의 목적이 불특정 다수의 고객의 자금으로 타회사에 대한 지배력 행사를 금지하는 것이라면 계열금융회사 이외의 은행을 포함한 국내 금융회사와 외국계 금융회사에 대해서도 같은 규제를 적용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않은 것을 볼 때 이 제도가 재벌계열 금융회사만을 규제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국민연금의 주식의결권 행사는 그 성격이 다르다. 국민연금은 개인이 국민연금을 자발적으로 선택해서 자신의 자금을 신탁한 것이 아니다. 결국 금융회사의 경우와는 달리 국민연금은 국민의 강제가입으로 조성된 기금으로 주식에 투자하기 때문에 개인의 자금이전을 통한 잠재적 의결권이 국민연금에 신탁되었다고는 볼 수 없다. 따라서 국민연금의 주식의결권 행사는 원칙적으로 허용될 수 없다. 그러므로 투자와 회수가 자유로운 금융자본의 의결권을 제한하는 것과 강제로 조성된 국민연금의 주식의결권을 허용하는 정부의 정책은 모순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강제저축 형식으로 조성된 자금인 국민연금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은 의결권행사에 대한 한계가 있기는 하나 수익을 창출하여 연금을 제공해야 하기 때문에 수익성을 무시할 수는 없다. 즉 수익성의 추구라는 입장에서 보면 국민연금의 주식의결권 행사는 금융회사의 경우와 같이 반드시 필요하다. 다만 우리가 우려하는 것은 국민연금이 수익성과 관계없이 주식의결권을 행사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정부는 연금운용의 독립성을 보장하겠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정부의 영향력이 계속 직간접적으로 미칠 것이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다. 결국 정부는 기업의 지배구조 개선이라는 명목 하에 기업경영권의 자율성을 보장하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이다. 이러한 기업의 정부정책에 대한 불신감 때문에 연기금의 의결권 제한이라는 주장을 재계가 고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금융회사와 국민연금의 주식의결권 행사를 모두 허용하는 것이 바람직한 제도개선 방향이다. 단 시장규율이 적용되지 않는 국민연금의 의결권행사는 공정하고도 신뢰할 수 있는 운용기관을 설립한 후에 허용해야 한다. 금융회사의 의결권행사와 관련된 이해상충의 문제는 소송과 시장규율에 의해 해결해야 한다. 공정경쟁을 제한하는 금융계열사의 의결권제한을 대기업집단의 구조개혁 수단으로 이용해서는 안된다. 대기업집단의 구조개혁은 구태의연한 정부규제보다는 적극적인 대외개방을 통한 경쟁압력과 자율적 개혁을 통해서 해결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대기업집단이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게 하는 방식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