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금융허브 실현, 인종적·문화적 다양성 선행돼야
08. 5. 2.
0
이태규
성장 정체기에 접어든 우리나라의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금융 산업을 많이 꼽는다. 현 정부도 금융 산업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동북아 금융허브로의 성장을 주요 정책과제로 삼고 추진해 왔다.
금융허브란 결국 세계 유수 금융회사와 그 인력들의 집적으로 형성된다. 금융업의 핵심투입 요소는 인력이고, 그 인력들이 불편 없이 비즈니스를 영위할 수 있는가의 여부가 금융허브 실현의 아주 중요한 요소이다. 이 때문에 외국인을 위한 교육·의료 등의 생활환경 개선을 금융허브 실현을 위한 중요한 과제로 삼고 있다. 하지만 필자는 이러한 하드웨어적인 생활환경 개선에 못지않게 금융허브를 잉태하고 성장시킬 수 있는 소프트웨어적 환경 조성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소프트웨어적인 환경이라 함은 다양한 인종 및 국적을 가진 사람들의 근로 및 생활여건을 둘러싼 사회·문화적 환경이라 할 수 있다.
현재 금융허브라 불리는 도시들은 대부분 코스모폴리탄(Cosmopolitan)적이라 할 수 있다. 코스모폴리탄적인 환경에서는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공존하면서 외국인들이 편리하고 안정적으로 생활할 수 있다. 우리나라도 과거에 비해 외국인 거주자가 늘었고, 경제뿐만 아니라 사회·문화적 개방 정도가 상당히 진척되었지만 아직 우리 사회가 코스모폴리탄적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함이 많다.
지난 8월 유엔 인종차별철폐위원회는 보고서를 통해 한국 사회에 인종적 우월감이 널리 퍼져 있다고 우려하면서 ‘단일 민족국가’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은 우리 영토 내에 거주하는 타민족과의 관계 증진에 장애가 될 수 있다고 지적하였다. 또한 유엔은 한국 내의 모든 다른 인종이나 민족, 국적을 가진 사람들 간의 이해와 관용, 우의 증진을 위하여 교육·문화·정보 등의 분야에서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하였다.
그 동안 우리 사회에 혼혈이나 이주 노동자 등에 대한 유·무형의 차별이 있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고 이 배경에는 잘못된 ‘순혈주의’도 한 몫하고 있기 때문에 이 같은 유엔의 지적은 우리의 아픈 곳을 찌른 셈이다. 한 연구에 따르면 우리나라 초등학교 사회교과서가 지나치게 민족중심으로 서술되어 있으며 우리 민족문화의 우수성을 강조하기 위해 타민족을 폄훼하는 대목도 많다고 한다. 이 같은 교육은 어린이가 코스모폴리탄적 사고를 가진 시민으로 성장하는 것을 저해할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문화가 개방화 시대에 부적합한 방향으로 흐를 수 있는 요인을 제공할 수 있다. 경제성장에 있어서 문화적 요소(cultural factor)의 역할에 대해 다수의 연구를 통해 그 중요성이 인식되고 있다. 따라서 개방화 시대에 역행하는 사회·문화적 환경으로 인해 성장잠재력이 저해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유엔의 지적과 권고는 우리의 인권 신장의 측면뿐만 아니라 경제적 측면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금융허브 실현뿐만 아니라 ‘동북아 중심 국가’, ‘선진 통상국가’ 등의 비전이 단순히 구호에 그치지 않고 실현가능한 목표가 되기 위해서는 인종적·문화적 다양성을 수용할 수 있는 사회·문화적 환경이 조성되어야 하고, 이것이 향후 우리나라의 경쟁력 제고에 있어 중요한 요소임을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세계 최고의 투자은행 가운데 하나인 골드만삭스의 2만6000여 명 직원의 국적은 150개국에 이르고, 이들은 무려 84개의 서로 다른 언어를 구사한다고 한다. 골드만삭스 최고경영진은 언론 등을 통해 우수한 인재를 확보하기 위해 이 같은 다양성을 추구하고 유지하는 노력이 중요한 요소임을 여러 차례 밝혔다.
금융허브를 지향하는 우리의 경우 골드만삭스와 같은 다양성을 추구하는 기업문화가 정착되어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다. 금융허브란 결국 다양한 배경의 고급인력들이 금융부문에서 최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다양성을 수용할 수 있는 사회·문화적 여건이 필수적이다. 우리나라가 아시아의 ‘인종 용광로(Melting pot)’로 불릴 수 있도록 인식의 전환과 많은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