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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칼럼

TV광고의 화려함과 그 이면

08. 5.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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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홍

TV광고를 보면 자유롭고 창의적이며 화려하단 생각이 든다. 광고를 자본주의의 꽃이라 칭하는 것에 동의하게 된다. TV광고에 나오는 연예인들은 어찌 그리 예쁘고 멋있고 유혹적이면서도 믿음직한지. 더욱이 최근 TV의 품질이 좋아지면서 광고의 화려함도 더 깊어지고 있다. 동경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한 아름다운 남녀 모델들, 일탈을 꿈꾸게 하는 유럽의 파리와 눈부신 에메랄드 빛 바다, 심장을 뛰게 만드는 강렬한 색깔들과 다이내믹한 그래픽 등, 광고의 자유로움과 화려함을 설명하기엔 언어가 부족하다.

그러나 이처럼 꿈같이 아름다운 TV광고의 이면은 어둡고 힘들다. 21세기 자유주의 국가에서 어떻게 이런 통제와 간섭이 유지될 수 있는가 의아스럽다. 방송사와 광고주들은 자유롭게 광고를 사고 팔수가 없다. 지상파방송의 모든 광고거래는 공기업인 한국방송광고공사(KOBACO)를 통해서만 가능하도록 법으로 규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광고요금도 KOBACO에 의해 통제된다. 통제된 광고료는 수요와 공급을 일치시키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인기시간대의 광고를 사려면 원하지 않는 종교방송의 광고까지 구매해야 한다. 광고료는 광고효과를 반영하는 시청률에 따라 결정되어야 하지만 현재의 광고요금은 시청률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 즉 광고라는 상품이 제 가치를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또한 광고의 물량, 즉 광고할 수 있는 시간은 방송법에 의해 역시 엄격하게 규제되어 있다. 꼭 필요한 경우라도 가격이나 물량의 둘 중의 하나만 규제함이 정상적인데, 광고는 규제할 이유가 별로 없음에도 가격과 물량을 동시에 규제하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다.

이 뿐만이 아니다. 또 정부는 방송위원회를 통해 광고의 내용을 사전적으로 검열한다. 성적인 연상을 불러일으킨다는 이유로 이미 만들어진 광고를 방영하지 못하게 하기도 한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그 광고를 보는 대부분의 시청자들은 그런 연상을 하지도 못하는데 심사위원들만은 그런 성적 연상을 매우 잘한다는 점이다. 상품을 판매하는 짧은 광고가 무슨 심각한 문제를 초래한다고 그리 엄격하게 사전검열을 하는지 알 수 없다. 드라마 등 방송프로그램은 사전검열이 아니라 사후적으로 심사를 하는데 광고가 본 프로그램들보다 더 사회적으로 위험한 것인가 보다. 거래, 물량, 가격, 그리고 내용까지 통제할뿐 아니라 광고에는 방송발전기금이라는 준조세가 부과된다. 아마도 KOBACO가 광고거래를 대행하는 수고를 했다고 뜯어가는 수수료인가보다. 아무도 광고거래를 대행해달라고 부탁한 적도 없는데 말이다.

이처럼 TV광고는 온통 규제뿐인 감옥같은 환경에서 그 화려한 꽃을 피우고 있다. 광고의 자유로움, 창의성, 화려함의 이면에는 극히 전근대적이고 가부장적인 통제와 억압이 깔려있는 것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이런 모순된 제도가 유지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첫째, 허구적 공익론의 무서움이다. 가장 창의적이고 자유로워야 할 광고를 창살과 쇠사슬로 구속한 자들의 변명은 공익을 위해서란다. 공익론의 극치는 ‘광고요금을 자율화하면 시청률경쟁이 심해지고 그렇게 되면 프로그램이 저질이 되어 결국 공익을 저해한다’는 주장이다. 매우 선동적인 이러한 주장은 현재와 같은 통제를 지지하고 광고시장의 자율과 경쟁을 반대하는 자들이 헌법이나 성경처럼 인용하는 논리임을 밝혀둔다. 이미 지적한 것처럼 현재는 광고요금이 KOBACO에 의해 인위적으로 규제되어 있어 시청률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 그러나 시청률은 광고효과를 결정하므로 시청률에 비례하여 광고비가 결정되는 것은 극히 당연한 일이다. 광고수입이 재원의 거의 전부를 차지하는 방송사들이 광고수입을 높이기 위해 시청률이 높은 프로그램을 만들려고 더욱 노력해야 함도 극히 당연하다. 그런데 시청률경쟁을 하면 프로그램의 질이 낮아진단다. 즉 저질의 프로그램을 내보내면 더 많은 국민들이 좋아하고 본다는 말이다. 공익론자들의 이러한 주장이 이론적, 실증적으로 아무 근거가 없음을 지적하기 이전에, 이러한 주장에는 국민들을 수준 낮은 저질로 간주하는 전제가 깔려있음에 분노한다. 선정적이고 저질스런 방송을 내보내기만 하면 대한민국 국민들은 바보처럼 좋아하면서 TV 앞으로 몰려든다는 공익론자들의 전제에 마땅히 분노해야 한다.

물론 프로그램의 질을 평가하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 어떤 방송이 질좋은 방송인가를 따지는데 헛된 노력을 낭비하지 말자. 그보다는 먼저 국민들이 TV에서 기대하는 수준이 어느 정도인가를 생각해보자. 공익을 위해 TV가 온통 톨스토이와 바하, 로마시대의 역사와 유익한 과학 프로그램으로 가득 차있다고 생각해보자. 분명히 그런 프로그램들은 수준높은 훌륭한 것이겠지만, 장담하건데 시청률은 2-3%를 넘지 못할 것이다. 국민의 제한된 자산인 소중한 전파를 이용하여 막대한 제작비용을 들여 겨우 국민의 2-3%에게만 만족을 준다면 이보다 공익을 저해하는 비효율적 낭비가 어디 있단 말인가? 많은 국민들은 하루의 피곤한 일과를 마치고 몸과 마음을 쉬기 위해 TV를 본다. 다소 통속적인 드라마와 다소 억지스런 오락프로그램, 스포츠와 개그, 대중가요와 흥미로운 다큐멘터리, 그리고 세상의 희노애락을 전해주는 뉴스 등이 시청자들이 TV에서 기대하는 것들이다. TV를 보면서까지 긴장하고 노력하고 공부해야 한다면,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프다. 시청률이 높다는 것은 많은 국민들이 그 프로그램에서 기쁨을 얻는다는 뜻이다. 공익론자들의 전제와 달리 우리 국민들이 포르노와 폭력에 중독된 저질들이 아니라면, 시청률이 높은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은 공익을 위한 방송사의 기본적 기능이어야 한다.

둘째, 잘못된 제도로부터 수혜를 받은 이익집단들의 이기심과 눈감음이다. 현실에는 KOBACO 제도를 지지하는 집단들이 많이 있다. 아무리 현재의 통제제도가 나쁘다고 할지라도 그로 인해 이익을 본 사람들이 매우 많다는 것이다. TV광고비의 규제로 반사적 이익을 얻고 있는 신문사들, 낮은 청취율과 낮은 광고효과에도 불구하고 높은 광고비에 강제적 광고판매로 재정적 도움을 받고 있는 종교방송사들, 과거에는 공익자금으로 불리던 방송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은 많은 문화예술단체들, KOBACO로부터 프로젝트를 받은 학자들, 그리고 정치가들과 등등. 지난 25년 이상 광고가 통제되면서 오히려 이익을 얻은 많은 수혜자들은 당연히 현재의 억압을 지지하고 자유를 반대한다. 그 중에서도 아이러니한 것은 종교방송들이 군부독재정권의 유산물인 KOBACO의 지원을 받아 사랑과 자유와 정의를 전파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개인이든 조직이든 자신의 이익을 추구함을 비난하고자 함이 아니라, 공익에 반하는 사익을 추구하도록 조장하는 현재의 통제체제를 비난함이다.

마지막으로, 평범하지만 중요한 교훈을 얻는다. 어떤 제도든지 일단 만들어지면 없애거나 개혁하기 매우 어렵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처음 제도를 만들 때 정말 좋은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는 교훈이 소중하다. KOBACO제도로 불리는 현재의 통제제도는 80년대 전두환 군사정권이 언론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만든 체제이다. 현재의 통제체도의 출발이 그 어떤 정당성도 갖지 못했음은 공익론자들이나 현 체제의 수혜집단들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들어지지 말았어야 하는 제도가 25년 이상 지속되어 오면서 사람들은 과거를 잊고, 현 상황에 순응했으며, 많은 이익집단들의 이해관계가 얽혀버렸다. 국민들이 TV광고를 보면서 이런 이면의 스토리를 알 필요는 없다. 단지 소수의 진정한 공익을 걱정하는 힘있는 정치가들이 세상을 바로잡아 주기만을 기대할 뿐이다.

김재홍 (한동대학교 경영경제학부 교수, jhong@handong.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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