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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RI 지난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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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칼럼

노동시장에서 노동법의 역할

08. 4.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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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훈

노동정책의 큰 흐름은 노동시장의 유연성과 안전성을 동시에 추구하는 유연안전성(Flexicurity)의 달성이다. 노동시장에서의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노동법의 역할은 무엇인가? 이에 대한 답은 시장과 법의 관계로부터 찾아보는 것이 순리이다.

시장은 거래 당사자들 사이의 자발적 교환을 가능하게 해주고 이를 통해 경제는 발전한다. 이러한 자발적 교환은 계약이라는 법적 수단을 통해 이루어진다. 계약은 시장에서 거래 당사자들의 자율성과 대등성을 전제로 서로간의 이기적인 의사를 상호검증하고 때로는 일치시켜가며 자원을 보다 효율적이고 생산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사람에게 이전시켜주는 사적자치 수단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계약체결 전에는 발생하지 않았던 협력적 잉여가치가 창출되고 이를 계약당사자들이 분배해 가짐으로써 모두의 후생은 증가하게 된다. 다만 계약 당사자들이 계약을 위반하고자 하는 기회주의적 행동을 보일 수 있다. 이로 인해 계약기능이 원활히 작동하지 않을 위험이 있으므로 이에 대비하여 시장기능을 보완해 주기 위해 민법상의 계약관련규정들(계약법)이 필요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노동계약은 민법상의 계약관련규정의 지원을 받으며 노동시장에서 노동이라는 인적자원을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사용자에게 이전하여 최대의 잉여를 창출하고 이를 공정하게 배분하는 사적자치 수단이다. 그러나 근로자는 생존을 위해 자신의 노동력이라는 상품을 낮은 가격에라도 팔 수 밖에 없으므로 사용자에게 종속되어 노동을 제공하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따라서 국가는 계약당사자들의 자율성과 대등성을 전제로 출발하는 민법상의 계약관련 규정만으로는 노사간의 공정한 계약이 체결·유지되는데 한계가 있다고 판단하여 민법의 특별법인 노동법을 통해 시장에서의 노사관계에 개입하고 있다.

그러나 사용자들이 제한적 노동시장에서 구인경쟁을 해야만 하는 현대의 노동시장은 산업화 초기의 무제한적 노동공급의 시기와는 확연히 다르기 때문에 모든 근로자가 약자라는 것을 전제로 이들을 보호해야만 한다는 생각에 급급해 노사간의 자율적 계약관계에 노동법이 너무 깊숙이 개입해서는 안된다. 노동시장에서 계약 본래의 기능이 오히려 훼손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잘못은 법이 당장 눈에 보이는 효과에 집착하여 현재의 법적 판단이 미래의 인간들의 행동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명시적으로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다. 이러한 고려가 없을 경우 애초에 의도했던 것과는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현행 법제도 중 의도는 좋았지만 결국 실패하는 경우는 대부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임대차 계약관계에서 민법상의 임대차 관련규정만으로는 약자인 임차인을 보호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임대차보호법이라는 민법의 특별법을 통해 임대료 등 계약의 내용을 지나치게 규제할 경우 현재의 임차인은 보호를 받는 듯 하다. 그러나 임대인들은 앞으로 더 이상 새로운 임대주택을 짓거나 기존의 주택을 보다 잘 관리하고자 하는 유인이 줄어들어 궁극적으로는 대부분의 임차인들에게 피해를 주게 되는 문제점이 나타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임대인들의 행동변화로 인한 효과는 임대차 시장에서 서서히 나타나기 때문에 규제정책의 유혹을 떨쳐버리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노동법이라는 민법의 특별법에 사용자의 해고권 등을 지나치게 제한하는 규정이나 시장환경의 변화에 따른 기업의 유연한 대응을 어렵게 하는 노동조합 관련 규정을 마련하는 것은 이미 취업한 일부의 근로자들을 당장은 보호하는 듯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모든 근로자의 후생을 감소시킬 수 있다. 자율적인 노동계약을 통해 다양한 특성을 가진 인적자원을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배치하며 최대의 잉여를 창출해야만 하는 사용자의 입장에서 노동법상의 이러한 규정들은 고용비용을 증가시키고 결국 고용기회의 감소로 이어져 취업근로자와 취업희망자간의 갈등을 야기할 수 있다.

이러한 논리를 노동법이 불필요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노사간 계약의 대상인 노동력이라는 상품은 분명 다른 계약의 대상들과는 성질이 다르므로 일반적인 민법상의 계약규정들의 연장선상에서 이를 달리 취급할 필요성은 존재한다. 이러한 필요성은 현재와 같은 무한경쟁의 시대에서 노사가 모두 윈윈(win-win)하기 위함이다. 이것은 효율적이고 신속한 인적자원의 배분을 통한 최대의 협력적 잉여가치 창출과 공정한 배분이라는 계약의 기본적 기능 회복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노동시장 유연화를 위한 노동법의 역할이다.

그러나 노동시장에서의 노동법의 역할은 여기에 그쳐서는 안된다. 노동법은 노사간의 계약적 효율성 외에도 근로자의 생존권 보장이라는 이념을 추구하기 때문에 노사간의 관계 또는 노노간의 관계를 시장에서의 계약논리로만 설명하는 데는 분명 한계가 있다. 따라서 노동관련법 중에는 근로기준법 등과 같이 계약논리에 기초하며 계약법의 연장선상에서 노동계약의 기능을 지원해 주는 법 외에도 이러한 계약논리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계약영역의 외곽에서 노동계약의 기능을 지원해 주는 법이 있어야만 한다. 계약관계 내부의 노동시장에 머무는 취업근로자와 아직 계약관계로 들어서지 못하고 외부노동시장에 머물러 있는 취업희망자 사이에서의 진입과 퇴출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마찰을 최소화시켜 주며 사회안전망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근로자복지 관련법 및 고용정책 관련법들이 그것이다. 다만 이러한 법들은 단순히 시혜적인 성격의 것이 되어서는 안되고 근로유인을 높일 수 있도록 시장친화적인 성격을 가져야만 한다. 그래야만 고용계약영역에서의 유연성과 조화를 이루며 노동시장에서의 안전성을 지속적으로 유지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측면에서 보면 노동시장에서 노동관련법이 추구해야 할 유연성과 안정성은 서로 모순되는 것도 아니고 충돌되는 것도 아니다. 다만 노동시장에서 계약기능이 수행해야 할 역할과 사회안전망이 수행해야 할 역할을 구분하지 못하고 가시적인 정책 효과를 얻기 위해 계약기능에 대한 직접적 개입이라는 손쉬운 방법을 통해 안전성을 추구하고자 할 경우에는 노동계약의 경직성만 야기할 뿐 노동시장의 안전성과 유연성 중 그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달성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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