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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칼럼

미국의 대북식량지원과 우리의 자세

08. 5.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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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호

미국이 다음 달부터 1년여에 걸쳐 북한에 50만 톤의 식량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지난 해 가을부터 계획된 식량지원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 북한이 6자회담에서 합의한 핵 폐기 프로세스에 성의를 보인 것에 대한 미국의 화답 차원에 이루어진 조치임에 분명하다. 우리 정부는 이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다.

이명박 정부는 정권 출범과 함께 최근까지 “인도적 식량지원은 조건 없이 하겠지만, 먼저 북측의 요청이 있어야 한다는 게 원칙”이라는 입장을 견지해 왔었다. “조건 없이”, 즉 인도적 지원은 핵문제에 연계하지 않고 정치적 문제와는 관계없이 추진하겠다는 의미이고, 북한이 먼저 지원을 요청하는 것을 전제조건으로 삼겠다고 천명한 것이다. 그런데 북한은 우리 정부에 인도적 식량지원을 요청하기는커녕 핵 폐기 프로세스와 연계하여 미국의 식량지원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급기야 여당과 정부 내 일각에서 “북한의 식량 상황이 매우 심각하다고 확인되거나 북한에 심각한 재해가 발생할 경우 요청이 없더라도 식량지원 추진을 검토하겠다.”는 의견이 개진되었다. 원칙보다는 주도권 상실이라는 명분을 더 중요시하겠다는 것이다.

사실 북한에 식량을 지원해야 하는지는 이슈가 아니다. 우리 정부가 국제공조에서 주도권을 잃게 될 것인지도 큰 문제가 되지 못한다. 중요한 점은 정권 초기 온 국민이 이명박 정권이 어떻게 대북정책을 펼쳐나가는가 지켜보고 있다는 것과 북한 또한 우리 정부의 대북정책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를 예의 주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남북관계가 일거에 장밋빛으로 환하게 다가오는 것은 아니다.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은 지난 10년 동안 우리 정부가 북한에 보여준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말로만 보일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줄 필요가 있는 것이다.

대북 식량지원은 남북관계사에 있어서 번번이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남북관계가 경색 국면에 처할 때마다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항상 등장했던 중요한 도구였고 북한 주민들의 남한에 대한 인식을 점진적으로 바꾸어 놓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식량지원이 남북관계에 있어서 항상 긍정적인 역할만 한 것은 아니다. 북한에 지원되는 식량의 분배 모니터링은 남북관계에서 항상 첨예한 갈등 소재였고, 우리 사회에서도 ‘대북 퍼주기’라고 종종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식량지원은 인도적 지원의 대명사로서 인류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차원에서 추진되어야 할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늘 정쟁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이다.

우리 정부는 대북 식량지원과 관련하여 좀 더 의연하게 장기적인 관점에서 대처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그랬듯이 앞으로도 많은 경우에서 대북 식량지원이 남북관계에 큰 역할을 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대북 식량지원이 더 이상 남북관계 진전의 걸림돌이 되도록 해서는 안 된다. 우리 정부의 대북 식량지원이 이미 천명한 원칙대로 조건 없이 진행되어야 함과 동시에 북한 정권이 남북 관계에 전략적 도구로 이용하도록 해서도 안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원칙이 제대로 지켜져야 할 것이고, 예측 가능하게 추진된다는 교훈을 적절히 드러내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명박 정부가 원칙에 철저하겠다고 천명한 대북 정책의 첫 시험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북한은 이미 미국을 통해 식량 50만 톤을 확보한 상태이고, 급박한 고비는 넘길 것으로 보인다. 미국도 이미 식량지원을 약속한 상태이다. 우리 정부가 뒤늦게, 그것도 천명한 원칙을 바꿔가며 식량지원을 추진할 필요는 없다. 우리 정부가 대북 협상 및 국제공조에서 주도권을 상실한 것인지를 논할 문제는 아니다. 서로의 역할과 그 역할이 좀 더 효과적으로 발휘될 시기가 다르게 나타날 따름이다. 지금은 미국의 전략적 행동이 북한의 핵 폐기 프로세스에 더 효과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시기인 것이다. 우리 정부가 나서야 할 시기는 조만간 다가올 것이고, 우리 정부의 역할이 효과적으로 발휘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그 시기가 닥쳤을 때를 대비하여 어떻게 준비를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논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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