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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RI 지난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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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법과 제도이슈

재벌개혁과 글로벌 금융위기의 ‘희한한 동거’

09. 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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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훈

2008년, 우리 사회는 두 가지 큰 사건을 경험하였다. 하나는 삼성그룹 전 법무팀장인 김용철 변호사가 제기한 각종 의혹을 계기로 발단된 ‘재벌개혁 논쟁’이고, 또 하나는 지금까지도 겪고 있는 ‘미국발 금융위기’이다. 먼저 삼성그룹은 이 사건을 계기로 외형상 해체를 선언하고 오너가 경영일선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후자의 사건을 계기로 현재 금융규제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이 두 사건은 얼핏 보기에 별로 연관성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가공자본’이라는 관점에서 들여다보면 흥미로운 점이 발견된다. 현재 재벌개혁 논쟁의 핵심은 재벌총수가 계열사 간 피라미드 소유구조, 상호출자, 순환출자 등을 통해 가공자본(fictitious capital)을 만들어 적은 지분만 소유한 상태에서 이보다 훨씬 많은 의결권을 행사하며 권한을 남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주가를 떨어뜨린 무능한 지배주주는 외부의 소수주주들이 힘을 합해 몰아낼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가공자본이 회사지배권(적대적 M&A)시장의 이러한 기능을 막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주주행동주의를 앞세우며 적극적으로 회사의 경영권에 간섭하는 헤지펀드들을 재벌의 가공자본에 대항하는 자본시장의 첨병이라고 환영한다.

이러한 헤지펀드들은 사전에 주식의 의결권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주식의 경제적 리스크만 모두 헤지하는 등 다양한 파생금융기법을 사용해 주식의 소유권과 의결권을 분리하고 있다. 소위 공투표(empty voting)에 기초하며 활동하고 있다. 이 역시 가공자본임에 틀림없다. 이때 같은 가공자본임에도 불구하고 재벌이 만들어낸 가공자본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비정상적이고 후진적인 형태인 반면, 이에 대항하기 위해 헤지펀드들이 만든 가공자본은 선진국의 최첨단 금융기법으로 만든 것이므로 긍정적 기능을 한다고 보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헤지펀드들이 애용해 온 선진 금융기법들을 재벌 감시의 첨병으로 여겨 온 일부의 경제 전문가들이 최근 발생한 금융위기를 계기로 이러한 금융기법을 비판하고 있다. 미국발 금융위기의 원인은 서브프라임 대출을 기초자산으로 첨단 금융기법을 사용해 무분별하게 파생금융상품을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비판하며 금융규제 강화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재벌의 가공자본에 대항하기 위해 헤지펀드들의 가공자본을 정당화 하면서 동시에 이러한 헤지펀드들의 파생금융기법을 금융위기의 원인으로 보며 금융규제를 정당화하고 있다. 재벌개혁 해법과 금융위기 극복 해법 사이의 ‘희한한 동거’가 시작된 것이다.

그 이유를 회사의 소유지배구조라는 관점에서 살펴보자. 기업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기업가 자신의 자금만으로는 안 된다. 외부에서 자금을 조달해만 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경영에 참가하는 내부 지배주주와 그렇지 않은 외부 주주그룹이 발생하고 이들 사이의 갈등이 시작된다. 내부 지배주주는 자신의 경영권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며 외부로부터 더 많은 자본을 끌어 모으려고 할 것이고, 외부 주주들은 이러한 내부자의 사적이익추구를 더욱 철저하게 감시하려고 할 것이다. 그리고 내부자의 경영권 유지, 외부자의 경영감시 강화를 위해서는 각자가 더 많은 주식을 취득해야 한다. 그러나 이때 필요한 것은 주식의 경제적 가치가 아니라 의결권이므로 내부자와 외부자 모두 적은 주식을 소유하면서도 더 많은 의결권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할 것이다.

내부자가 주로 사용하는 방법이 흔히 가공자본이라고 비판받는 차등의결권, 피라미드 소유구조, 상호출자, 순환출자 등이고, 외부자가 주로 사용하는 방법이 다양한 첨단 금융기법들이다. 이와 같이 회사의 내·외부자 모두 가공자본을 창출하려는 인센티브를 가지고 있고 실질적으로 그렇게 하고 있다. 그렇다고 이 중 어느 한쪽의 가공자본은 좋고 다른 쪽은 나쁘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각각의 장·단점이 있을 뿐이다.

외부 주주인 헤지펀드들이 파생금융기법을 통해 적은 지분만 가지고 많은 의결권을 행사할 경우 자본시장의 감시기능을 강화하는 긍정적 측면이 분명히 있다. 반면 이러한 헤지펀드 중에는 가공자본을 이용해 투기적 목적을 가지고 회사의 장기적인 이익과 주주 전체의 이익보다는 자신들의 단기이익을 추구하는 경우도 있다.

마찬가지로 내부 지배주주에 의한 가공자본 창출이 외부 주주들과 상충하는 측면도 있겠지만 회사 전체의 이익에 부합하는 측면도 분명히 존재한다. 자기 재산의 상당부분을 하나의 회사에 투자한 지배주주는 분산투자를 한 일반 주주들보다 회사의 발전을 위해 더 많은 노력을 할 것이다. 따라서 지배주주는 자신의 지배권을 바탕으로 회사의 이익이 저조할 경우 적기에 강력한 조치를 취할 수 있다. 또한 회사가 어려움에 처하기 전에 전략적인 경영변화를 꾀할 인센티브와 힘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지배주주의 장기적 투자 성향과 전략은 자본시장에서의 단기성향의 움직임에 휘둘리지 않고 회사의 지속적인 발전을 가능하게 한다. 특히 가족 소유기업의 경우는 일반적인 지배주주의 경우보다 더욱 장기적인 관점에서 구성원들 간의 신뢰에 바탕을 두며 성공에 대한 의지를 발휘할 수 있고, 이것이 현재의 금융위기 극복을 위한 기업가 정신의 초석이 될 수 있다.

결국 가공자본 그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장점도 얼마든지 있다. 따라서 회사의 내부주주와 외부주주 모두 가공자본을 사용할 수 있고 그렇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 경우도 있다. 다만 내부주주와 외부주주 모두 ‘내가하면 로맨스, 남이하면 불륜’이라는 일방적인 생각은 버려야 한다. 가공자본이 로맨스가 될지, 불륜이 될지는 결국 그것이 회사와 사회 전체의 이익에 얼마나 기여할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 따라서 법이 추구해야 할 것은 소유권과 의결권의 괴리를 강제적으로 일치시키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소유구조형태 사이에서의 경쟁이 왜곡 없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규범적 틀을 짜는 것이다.

2009년에는 이러한 규범적 틀 속에서 내부주주와 외부주주의 가공자본이 최적의 조화를 이루기를 기대해 본다. 바로 이러한 균형점에서 ‘재벌개혁 해법’과 ‘금융위기 극복 해법’ 사이의 ‘희한한 동거’가 아닌 ‘상생적 동거’가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신석훈 (한국경제연구원 선임연구원, sshun@keri.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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