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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자파독 52년 한독관계의 모습과 교훈


한국과 독일 양국은 1955년 국교를 정상화하고 한국이 1963년 광부, 1964년 간호사를 독일에 파견함으로써 양국 협조관계가 더욱 발전했다. 1964년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독일을 방문해 당시로는 큰 금액인 1억 5천만 마르크 (약 4000만 달러) 재정 상업차관을 얻어 외환이 없던 시절 경제발전자금으로 요긴하게 사용했다. 당시 한국은 1962년부터 경제개발5개년 계획을 실시하고 있었으나 미국의 원조가 줄어들기 시작하면서 외환보유액이 1억 달러 정도에 불과하고 수출이라고 해야 가발을 수출하는 정도였으니 외환이 부족해 공장을 세울 기계나 원재료 등을 사올 엄두도 내기 힘들고 심지어 미국걸프사와 합작한 대한석유공사의 한국정부지분 조차도 제 때 내지 못하고 있는 등 외환위기 상황이었다.

물론 당시 파독 광부나 간호사들은 당시 한국으로서는 고학력임에도 불구하고 일자리 구하기가 하늘에 별따기였고 일자리를 구한다고 해도 월급이 1-2만원 정도였던 시절, 10여 만원에 달하는 고액 월급을 받아 본인과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자원해서 파독을 지원했다. 불과 수백 명을 모집하는 광부의 경우 15만 명이 응모했다고 하니 최근 삼성전자 신입사원 모집을 방불케 하는 열기였다.


국내에서 일자리가 없으면 해외 나가서 설움을 당하는 것이 국민들이다. 모두 8천 여명의 광부들이 독일에 왔고 가장 많이 일했던 로베르크 탄광에는 많을 때는 400여 명의 광부들이 가건물 숙소에 머물면서 지하 1000~2000 미터 탄광에서 일했다는 모습을 둘러 보니 목이 메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안타까운 점은 한국인 광부들이 머물렀다는 가건물 숙소는 폐쇄되어 가 볼 수가 없었고 시설이 좋았던 독일 독신자 숙소를 둘러볼 수 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이런 가건물 숙소동이나 박정희대통령이 눈물의 연설을 했던 에센의 공회당을 매입해 후대를 위한 경제교육 장소로 사용했으면 좋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이곳 독일에서도 박정희대통령 흉상하나 세우는 것 마저 찬반으로 갈라져 추진을 못하고 있다는 교민들의 얘기에는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


한편 국가적으로는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이 10여 년에 걸쳐 송금한 돈이 1억 여 달러에 달했고 4천 만 달러 재정 상업차관까지 합쳐 경제발전의 요긴한 시드머니가 되었다. 한국은 이후 1965년 월남파병, 한일국교 정상화, 1973년 1차 석유파동이후 오일머니를 벌기 위한 중동진출 등 경제개발 초기 외환은 없고 변변한 수출제품도 없던 시절 고비 고비마다 해외진출로 외환위기를 넘기면서 발전해 왔다.


어려웠던 시절 이들의 피땀 흘린 댓가가 한편으로는 오늘날 한강의 기적을 이룬 소중한 자원이 되었던 것이다. 1964년 비행기도 없어서 독일 대통령이 보내 준 비행기를 타고 독일을 방문했던 박정희 대통령은 너무도 험한 일로 고생하고 있던 광부 간호사들을 격려하는 자리에서 “우리가 못나서 이 곳 이역만리에서 고생하고 있지만 우리 후손들에게는 잘 사는 조국을 물려줍시다”는 취지의 눈물의 연설을 한 흔적들을 여기저기서 볼 수 있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도 말이 국가원수 방문이지 본의 한 작은 민박집에서 머물렀다고 하니 당시 한국의 실상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1967년에는 독일 뤼브케 대통령의 방한이 있었다. 한국과 독일은 전후 분단의 아픔을 같이 나눈 동병상련의 국가였으나 독일은 동방정책 추진 등 통일을 착실하게 준비해 오다 1989년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 구소련연방이 붕괴에 직면하자 1990년 곧바로 평화통일을 달성했다. 그러나 한국은 여전히 남북관계가 교착상태에 빠져 있다. 2014년 3월 박근혜대통령은 독일을 방문하고 남북관계 발전을 위한 드레스덴 선언을 발표했지만 남북관계는 여전히 해빙의 실마리를 보이지 않고 있다.


2014년 기준 독일은 한국의 19위 수출시장(76억 달러 수출)인 반면 6위의 수입국(213억 달러 수입)이다. 2008년 이후 독일 성장 둔화와 원화가치 절상에 따른 가격경쟁력 약화로 무역수지 적자폭이 확대되고 있어 수출경쟁력 제도 등 대책이 필요한 실정이다.


독일은 경제정책과 통일정책에서 한국에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 경제정책을 보면 전후 오랜 사민주의가 초래한 과도한 복지, 재정악화, 성장률 하락, 실업증가로 몸살을 앓고 있는 독일경제를 재건하기 위해 사민주의를 추진해 온 사민당의 슈뢰더 수상은 1999년 영국의 노동당 블레어 수상과 함께 “블레어 슈뢰더 선언”을 발표하고 사민주의를 현대화하고자 하는 신중도(Neue Mitte)노선을 천명했다. 경제정책에서 사민주의의 결과적 평등을 지양하고 자기책임을 강화하는 등 과도한 ‘사회적’ 요인을 제거하고 ‘경제적’ 요인을 강화하자는 내용이다.

이어 슈뢰더 정부는 노동시장유연화 등 노동개혁을 위한 하르츠개혁(2003~5), 사회적 시장경제의 현대화를 위한 어젠다 2010(2003)을 추진하고 이어 교체된 기민당의 메르켈 정부도 동 정책을 이어받아 추진해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강한 독일 경제를 일구어 내고 있다. 이 밖에도 독일은 안정적인 금융제도와 세계에서 가장 강한 히든챔피언들이 강력한 독일 경제를 뒷받침하고 있다.


이 밖에도 인상적인 것 중 하나는 루르지방 탄광과 제철소들이 이제 사양산업화되자 이들 건물들을 이용한 문화복합공간으로 변신하고 있다는 점이다. 루르의 대형 탄광이었던 졸페어라인은 대형 루르무제움, 디자인센터, 디자인학교 등으로 변신해 2001년 유네스코로부터 인류유형문화유산으로 까지 선정되었다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졸페어라인과 루르무제움에는 연간 약 200만 명이 방문해 대략 600억 원의 수입을 올리고 있는 것으로 추산되었다. 한국광부들이 가장 많이 일했던 딘스라켄 지역의 로베르크 탄광도 공원 무제움 전시장 등으로 변신하고 있었고 제철소 건물들도 예를 들어 엄청나게 큰 저유탱크는 골조를 그대로 리노베이션해 무제움으로 사용하는 등 복합문화공간으로 변신하고 있었다. 한국도 이미 사양화된 탄광, 앞으로 사양화가 불가피해 질 제철공장지역의 미래를 위해 좋은 본보기가 될 것으로 생각되었다.


남북이 분단되어 있는 한국으로서는 독일의 통일정책에서도 많은 교훈을 배울 필요가 있다. 독일은 라인강의 기적을 토대로 통일독일을 일구어 낸 반면 한국은 한강의 기적을 통일로 연결시키지 못하고 있다. 독일은 동서독 관계정상화를 위한 동방정책을 추진하는 동시에 동서독 경제통합을 위한 경제통합과 통화통합 방안을 착실하게 연구하고 추진해 오다 구소련연방이 붕괴에 직면하는 등 기회가 오자 놓치지 않고 곧바로 평화통일을 달성했다. 준비된 자만이 기회를 살릴 수 있다는 교훈을 일깨워 주고 있다. 한국도 남북관계 정상화, 경제통합과 통화통합 방안을 연구수립하고 추진해야 기회가 왔을 때 평화통일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강한 경제와 평화통일을 이루어 낸 독일이 한국과 가장 큰 차이점은 독일은 이성주의 합리주의로 대화로 타협을 이루어 내고 국가와 민족 앞에서는 정파와 정당을 넘어 중장기정책을 추진하는 국가와 민족 우선주의인 반면 한국은 감성주의 교조주의 정파주의로 비타협적 대립과 갈등이 증폭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도 비타협적 대립과 갈등이 일상화되어 있는 감성주의 교조주의 정파주의를 지양하고, 민족과 국가의 장래를 위해서는 정파와 정권을 넘어서 중장기 정책을 수립 추진하는, 이성적 합리적이고 국가민족우선주의 사회와 국가로 환골탈태해야 사회도 안정되고 경제도 강건해 지며 평화통일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오정근(한국경제연구원 초빙연구위원, 건국대학교 특임교수 / joh@keri.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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