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martin-martz-RhF4D_sw6gk-unsplash.jpg

l    소통   l    KERI 컬럼

KERI 컬럼

전문가들이 펼치는 정론입니다.

한국경제연구원_WHITE_edited.png

납품단가 협상권 위임제의 문제


현재 국회에 수급사업자의 납품단가 협상권을 중소기업협동조합에 위임하고자하는 의원입법안이 상정되어 있다. 새 정부의 ‘중소기업 손톱 밑 가시 빼기’와 연관시켜 이 제도를 밀어 붙이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납품단가 협상권 위임제’는 경제적 자유를 훼손시키는 제도로서 협상 당사자인 대기업과 중소기업은 물론 경제전체에 커다란 피해를 가져 올 것이다. 어쩌면 중소기업이 가장 많은 피해를 볼 것이다. 단지 이익을 보는 사람들은 이 제도를 통해 독점적 지위를 이용해 지대추구행위를 하는 중소기업협동조합의 관리인들일 것이다. 중소기업에게 도움을 주려는 의도와는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오고 직접적인 거래 당사자들이 아닌 제3자인 중소기업협동조합의 관리인들만을 이롭게 하는 이 제도는 결코 도입되어서는 안 된다.

원사업자와 수급사업자 간의 관계


납품단가 협상권 위임제를 논하기 전에 먼저 원사업자와 수급사업자, 즉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계약이 어떻게 이뤄지는지를 보자. A라는 대기업과 B와 C라는 중소기업이 있다고 하자. 최종재를 생산하는 A 기업은 중간재를 생산하는 중소기업 B나 C 기업에게 최종재 생산에 필요한 중간재를 납품받는 계약을 맺으려 할 것이다. 이때 A 기업은 원사업자가 되고 B나 C는 수급사업자가 된다.


A가 B나 C와 납품 계약을 할 때 고려하는 것들은 복잡다양하다. 납품단가, 납품재의 품질, 기업의 기술력, 납품재의 공급 지속성, 기업의 경영상태, 경영자의 태도, 계약 이행성 등 여러 가지 것들을 따져서 결정한다. 반드시 낮은 납품단가를 제시한 기업과 계약이 체결되는 것은 아니다. 여러 가지 조건들을 비교하여 비록 B의 납품 가격이 C보다 높다하더라도 A는 B와 수급계약을 맺을 수 있다. 물론 다른 모든 조건이 동일하다면 B와 C 중 납품단가가 낮은 기업을 선택할 것이다.


이러한 수급계약 관계는 기업 생태계에 아주 중요한 것을 남긴다. 바로 기업과 산업의 경쟁력 향상이다. 일단 여러 가지 조건을 고려하여 A가 B와 수급계약을 맺었다고 하자.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니다. 더 중요한 일들이 벌어진다. B는 A와 수급계약 유지와 이윤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한다. 원가절감을 위한 경영과 기술의 혁신, 값싼 원자재 구입을 위한 노력, 품질개선을 위한 노력, 납품재를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위한 생산관리와 노사관리 등 끊임없는 노력을 한다. C 역시 다음에는 A와 계약 당사가 되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한다. 아니면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기업 D가 나타날 수도 있다. 그래서 다음 계약 시점에서 A와 계약 당사자 계속 B일 수도 있고, 계약 상대가 C로 바뀔 수도 있으며, 아니면 새로운 D가 계약 당사자가 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기업의 경쟁력이 향상되고 산업이 발전하는 것이다.


기업 생태계의 복잡성을 간과한 강제적인 협상권


납품단가 협상권 위임제는 이러한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수급계약 과정에서 대기업이 중소기업에 비해 우월적 지위에 있고 대기업이 이 우월적 지위를 남용하여 중소납품업체를 착취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대기업이 중소기업보다 우월적 지위에 있기 때문에 대기업과의 협상 당사자를 중소기업 자체가 아닌 중소기업협동조합을 통해 단체협약(collective bargaining)을 하도록 법으로 강제하는 것이다.

이러한 협상권 위임제는 복잡한 기업세계를 단순화하고 획일적으로 만드는 매우 위험한 시도다. 우리는 여러 분야에서 개별 특성과 자율을 무시한 획일화의 폐해를 많이 보았다. 협상권 위임제도 마찬가지로 기업의 개별 특성과 자율을 무시함으로써 많은 폐해를 낳을 것이다. 납품단가 협상을 중소기업협동조합을 통해 하게 한다면 우선 중소기업 간 경쟁이 사라져 기업의 경쟁력과 산업이 쇠퇴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앞에서 말한 원가절감을 위한 경영과 기술의 혁신, 값싼 원자재 구입을 위한 노력, 품질개선을 위한 노력, 납품재를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위한 생산관리와 노사관리 등의 노력이 감퇴하여 중소기업은 물론 대기업의 경쟁력까지 쇠퇴하고 산업의 발전이 둔화될 것이다.


협상권 위임제로 인해 가장 많은 피해를 보는 쪽은 보호하려는 중소기업들일 것이다. 이 제도 도입은 이해당사자가 아닌 제3자가 나섬으로 인해 협상기간이 길어져 필연적으로 대기업과 중소기업 모두의 비용을 높인다. 비용이 높아진다면 대기업은 이것을 피해가는 방법을 찾는다. 기업 내 중간재를 생산하는 계열사를 만들던가, 아니면 외국의 중소기업과 계약관계를 형성하려 한다. 우리나라 중소기업은 판로를 잃게 되어 결국 문을 닫게 되는 처지에 이를지도 모른다.


중소기업협동조합에 납품단가 협상권을 위임한다는 것은 달리 표현하면 중소기업협동조합의 관리인이 만족할만한 결과에 도달하게 한다는 의미다. 그러면 이해당사자가 아닌 제3자인 중소기업협동조합의 관리인이 권한이 강화되고 이제 이해 당사자인 중소기업의 이익보다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활동하는 도덕적 해이가 증가할 것이다. 이러한 폐해는 산별노조에서 이미 경험한 바다.

중소기업협동조합에 납품단가조정권을 부여하는 것은 정부가 카르텔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이것은 카르텔을 규제하는 공정거래법에 위배되는 것으로 정부의 정책 상 모순이다. 뿐만 아니다. 카르텔은 본질적으로 지속되지 못하고 와해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수요가 변화하거나, 어떤 중소기업이 기술개발로 인해 조합에서 정한 납품단가보다 낮은 가격에 납품하는 것이 이익이 된다고 하면 그 중소기업은 낮은 가격으로 거래하려고 하는 인센티브가 생긴다. 그렇게 되면 조합원들 간에 갈등이 생기고 장기적으로 납품단가 위임제는 유명무실해질 수 있다.

명분에 집작한 제도, 교각살우(矯角殺牛)


무엇보다 납품단가 협상권 위임제는 전제가 잘못되어 있다. 피상적으로 보면 대기업이 중소기업보다 우월적 지위에 있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대기업이 우월적인 지위에 있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대기업의 우월적 지위는 시장에 달려 있다. 최종재 시장이 비경쟁적인 경우 대기업은 중소기업에 우월적 지위를 가질 수 있지만 그렇지 않고 경쟁적이라면 대기업은 중소기업에 우월적 지위를 가질 수 없다. 정부가 법으로 진입장벽을 만들어주지 않는 한 비경쟁적인 시장은 거의 없다. 한편 중간재 시장이 비경쟁적이면 중소기업이 우월적 지위를 갖는다. 2011년 5월 엔진 부품인 피스톤링의 시장점유율 70%를 차지하는 유성기업의 불법파업으로 인해 현대차, 기아차, 한국GM, 르노삼성, 쌍용차 등 완성차업체들에 빗어진 생산차질의 사태는 이 사실을 잘 보여 준다.


대기업이 우월적 지위에 있다하더라도 그것이 반드시 남용되는 것은 아니다. 기업의 궁극적인 목표는 시장에서 오랫동안 생존하는 것에 있다. 기업의 생존은 소비자가 반복적으로 그 기업의 제품을 구매해줄 때 가능하다. 그것을 아는 기업은 소비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양질의 제품을 생산 공급하려고 한다. 그에 필요한 첫 번째 조건이 품질이 좋은 부품을 확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최종재를 생산하는 대기업은 품질이 좋은 부품을 공급하는 중소기업을 찾고 그 중소기업과 계약관계를 계속 유지하려고 한다. 따라서 대기업은 기본적으로 납품업체를 착취하려기보다는 장기적인 동반성장관계를 형성하려고 한다.


기업세계는 경쟁과 협동이라는 두 가지 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기업 세계는 명시적으로는 경쟁체제이지만 암묵적으로는 협동체제다. 경쟁을 통해 우수하고 효율적인 기업이 선택되고 그 기업들 간에 협동하여 재화와 서비스가 만들어 진다. 만약 경쟁을 막는다면 이러한 협동체계는 오히려 훼손되어 경제에 커다란 폐해를 낳는다. 납품단가 위임제는 ‘중소기업 손톱 밑 가시 빼기’가 아니다. 경쟁을 가로막는 잘못된 규제일 뿐이다.


물론 대기업과 중소기업간 거래에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우월적 지위를 남용하여 상대를 착취하거나 상대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가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현재의 각종 제도로서 통제 가능하다. 여기에 대기업의 우월적 지위 남용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납품단가 협상권 위임제를 도입하는 것은 과잉 규제며 교각살우의 우를 범하는 것이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고 경제적 피해와 사회적 갈등이 명약관화한 이러한 제도를 왜 도입하려는지. 정치 과잉이다.


안재욱 (경희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jwan@khu.ac.kr)

--------------------------------------------------------------------------------------------------------------------

* 외부필자 기고는 KERI 칼럼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