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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보호법의 부메랑: ‘의도하지 않은 결과’의 가설


‘의도하지 않은 결과’의 가설


비정규직법의 실패는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20세기 초 미국 대법관 브랜다이스(Brandeis)의 경구가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정부가 선한 뜻에서 일을 벌일 때 가장 큰 경계심을 갖고 자유를 지켜야 한다. 자유에 대한 더 큰 위험은 열정적 인간, 좋은 뜻은 가졌으나 그들의 행동이 초래할 결과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사람들이 저지르는 은밀한 침해 속에 숨어 있다.”


비(非)정규직법은 ‘비정규직 보호’라는 정언적(定言的) 명분에서 출발하고 있다. 인류 역사의 큰 실패 이면에는 늘 정언적 명분이 자리를 잡고 있다.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다”는 실패한 거대한 사회주의 실험이 그 극적 사례이다. 비정규직보호법도 예외는 아니다. 비정규직 보호를 위해 만들어진 비정규직법이 역설적으로 ‘비정규직해고법’이라는 부메랑이 되었기 때문이다. ‘사회적 약자’ 보호라는 ‘선의’(善意)로 포장된 비정규직법이 정작 비정규직들에게 비수를 꽂은 것이다.


현상 뒤에는 본질이 있다. 비정규직법 실패 요인은 2가지로 집약될 수 있다. 첫째는 누가 비정규직을 사회적 약자로 만들었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없었다는 것이다. 비정규직을 약자로 만든 것은 정작 ‘정규직 노조’였다. 그럼에도 ‘기업의 탐욕’으로 비정규직에게 마땅히 지불해야 할 것을 지불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정규직의 처우가 낮을 수밖에 없었다는 왜곡된 인식이 만연돼 있었다. 이는 참여정부의 좌파적 ‘지적 미숙’과 무관하지 않다. 둘째는 비정규직 처우 개선의 부담을 누가 짊어질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숙고가 결여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참여정부 당시 맹위를 떨치던 포퓰리즘으로 사실상 심각한 고려 대상조차 되지 못했다.


결국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포괄적 이해가 부족한 상태에서 비정규직의 고용안정성 문제를 법제(法制)로 풀 수 있다고 믿은 것이 첫 단추를 잘못 끼우게 한 것이다. 일정부분 정규직의 ‘양보’를 받아내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지 않는 상황에서,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꾀하는 법률로 비정규직은 그나마 다니던 직장마저 잃게 된 것이다.


비(非)정규직법 문제의 본질


비정규직법이 발효됨으로써 ‘판도라 상자’가 열렸다. 짧은 기간이지만 법이 의도했던 정규직으로의 전환효과보다 계약기간 만료에 따른 계약해지라는 일자리 상실의 피해가 더 큰 것으로 드러났다. 공공부문·금융부문·대기업 등 정규직으로의 전환여력을 가진 곳에서의 정규직 전환이 대부분 끝났기 때문에 실직의 피해는 앞으로 계속 커질 것으로 예측된다.


비정규직을 벼랑에서 구하려면 원점에서 근본적인 대책을 세워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과거 집권당이 정책 실패를 인정해야 하는데 그러한 인정은 진정한 ‘용기’를 요한다. 하지만 우리의 정치문화 수준에서 그 같은 용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때문에 본질이 아닌 문제에 ‘대립각’을 세우게 된다. 대량 해고사태가 발생한 것이 아닌 만큼 비정규직법의 피해를 ‘과장’하지 말라는 민주당의 역공(逆攻)이 구체적 사례라 할 수 있다.


비정규직법을 지지하는 입장에서는 비정규직법이 발효돼 설령 일부 비정규직이 일자리를 잃는다 하더라도 같은 수의 다른 비정규직 근로자로 채워진다는 논리가 그 저변에 깔려 있다. 하지만 이는 견강부회(牽强附會)가 아닐 수 없다. 새로운 직장을 찾고 새로운 사람을 쓰는 데에 따른 ‘거래비용(transaction cost)’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력서를 들고 수많은 직장의 문을 두드리는 것 자체가 비용이다. 기업 입장에서도 아무 비용 없이 구직자의 자질을 판별할 수는 없다. 법제가 잘못되어 있음으로써 피할 수 있는 거래비용을 지불하는 것 자체가 ‘사회적 낭비’인 것이다.


비정규직법으로 그나마 정규직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지지 않았냐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비정규직법의 강제가 없어도 필요한 만큼 시장에서 정규직으로의 전환은 일어나기 마련이다. 따라서 관건은 비정규직법에 의한 정규직으로의 ‘순수한’ 전환이 얼마나 되느냐 하는 것이다. 그 같은 ‘전환 규모’가 클 수는 없다. 기업의 입장에서 계약해지라는 ‘선택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정규직으로의 전환능력이 없는 기업이 단지 법률 때문에 자사의 능력 이상으로 정규직으로의 전환을 꾀하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 비정규직법이라는 규제를 통해 정규직의 숫자를 늘릴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정규직 고용총량은 ‘정규직에 대한 수요’에 의해 결정되는 바, 법제로 노동수요를 창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비정규직법으로 정규직의 숫자를 늘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정규직으로의 전환을 법으로 강제하고 대신 추가로 소요되는 비용을 국가가 보조하는 것이다. 이는 국가가 기업을 통해 돈을 주고 일자리를 사는 것과 마찬가지다. 지속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으며, 사회주의적 발상에 지나지 않는다.


비정규직 문제를 풀려면 기업들이 비정규직을 쓸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따져봐야 한다. 우리나라 비정규직 문제의 뿌리는 정규직의 ‘과보호’(過保護)에 있다. 기업의 입장에서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 최대한 지불할 수 있는 임금총액(또는 노동비용)은 정해져 있다. 만약 임금총액 중 상당부분을 특정 근로자 그룹이 생산성과 무관하게 ‘우선적’으로 가져간다면 나머지 노동자 그룹에게 지불할 수 있는 임금은 그만큼 제한될 수밖에 없다. 노조의 보호를 받는 정규직 근로자가 많이 가져가면 비정규직 근로자에게 돌아가는 몫은 작아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비정규직의 처우를 개선하려면 정규직의 ‘과보호’ 즉, ‘강성노조’와 ‘과보호 노동법’을 어느 정도 해체해야 한다.


현재의 비정규직법은 정규직의 혜택은 줄이지 않고 기업 또는 국가의 부담만으로 비정규직의 처우를 개선하라는 것과 다름없다. 기업의 부담이 커지면 경쟁력을 잃을 수도 있다. 또 국가에 부담을 지우는 것은 국민의 세금으로 민간기업의 임금을 보전하라는 것이다. 비정규직법이 갖는 본질적 한계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일자리 파괴하는 정치권의 소모적 정쟁


여야는 비정규직법의 ‘유예기간’을 놓고 대립을 벌이고 있다. 여권은 1년6개월을, 야권은 6개월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유예기간을 얼마로 할 것인가는 절대 문제의 본질이 될 수 없다. 유예기간이 필요하다는 것은, 비정규직법이 처음부터 잘못 입법되었다는 것을 드러낸 것이다. 비정규직법이 경제논리에 기초해 한국적 현실에 대해 적합성을 가졌다면 이를 유예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비정규직법이 실패한 규제라면 ‘충분한 시간’을 갖고 원점에서 문제를 논의하는 것이 정책순리이다. 유예기간 동안 비정규직의 해직 사태를 최대한 막고, 머리를 맞대 비정규직 문제를 다시 논의하는 것이 국민에 대한 책무일 것이다. 따라서 ‘충분한 시간’이 관건이다. 평소 국회의 생산성을 감안할 때 비정규직법을 근본적으로 논의하기에 6개월은 턱없이 짧은 기간이다. 그럼에도 6개월의 유예기간을 주장하는 것은 비정규직법을 ‘기정사실화’해 정치적으로 밀어붙이겠다는 속내를 비친 것이다.


문제를 더욱 악화시킨 것은 국회의 행태이다. 환경노동위 상임위원장은 “법을 무력화시키는 유예안은 절대 상정하지 않겠다”고 공언하고 개정안을 상정조차 하지 않았다. 상임위원장이 언제부터 자신의 정치철학에 맞지 않는 법안을 해당 상임위에 상정조차 하지 않는 권한을 가지게 되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상정거부는 그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개별 헌법기관인 국회의원들의 입법권을 제한하는 월권행위이다.


경기침체가 길어지면 그 파장은 결국 일자리로 이어진다. 그리고 일단 일자리가 줄면 여간해서 경기가 회복되지 못한다. 일자리 창출을 떠나 기존의 일자리 보존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더욱이 지금은 전 세계가 경제위기 상황에 허덕이고 있다.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도 부족한 때에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지는 못할망정 문제의 본질도 아닌 정쟁으로 ‘있는 일자리’마저 없애는 것이 우리 정치권의 현주소이다. 비정규직법을 둘러싼 소모적 정쟁이 그치지 않는 이유는 아직도 그들이 비정규직 근로자들의 아픔을 실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앵무새처럼 ‘서민을 위한 정치’를 입에 올린다. 진정성이 절실히 요구된다.


조동근 (명지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dkcho@mj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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