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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민주주의의 마법에 걸린 세종시


온 나라가 세종시 문제에 갇혀 꼼짝달싹 못하고 있다. 신의를 앞세워 원안을 고집하는 세력이 있는가하면 행정의 비효율성이나 자족성을 부각시켜 원안 수정을 주장하는 세력도 있다. 이들은 서로 대립적인 정견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모두 참여정부의 후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정권이 바뀌었지만 이명박 정부도 ‘경로의존성’에 사로잡혀 아직 ‘국가 균형발전’이라는 참여정부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1)


세종시는 유토피아적 사회공학의 산물


세종시의 원조인 ‘수도 이전’은 ‘국가 균형발전’이라는 이상적인 목표 실현을 위해 이성적으로 거대 국가계획을 설계하고 치밀하게 실행하면 ‘국가 균형발전’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치명적 자만’에서 유래했다.2) 세종시는 이미 역사의 유물이 되어버린 공산주의가 실행한 ‘유토피아 사회공학’에 몰입한 결과다.3) 유토피아적 사회공학은 비합리적인 현실을 일시에 제거하고 유토피아라는 이상적인 상황을 국가의 노력으로 당장 실현할 수 있다고 믿는다.

유토피아적 사회공학은 세종시와 같은 거대 국책사업에 대해 합리적인 논의를 불가능하게 한다. 합리적 논의는 바로 이념의 표명으로 변질되어 “너는 누구 편이냐”는 질책을 받는다. 이렇게 되면 합리적 논의는 사라지고 정치적 투쟁과 대결만 남는다. 정치적 이해관계와 당파성을 넘어선 합리적 토론의 장이 마련될 수 없다는 것이 우리 사회의 비극이고 한계이다. 이제 우리는 이를 직시하고 거대 국책사업을 근본적으로 성찰해야 할 시점에 도달했다.


우리는 그동안 정부 주도로 많은 국책 사업을 시행해 왔다. 국도와 고속도로, 항만과 공항을 건설하고 댐을 만들었다.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이행하려면 거대 국책사업이 필요하고 민간의 힘이 약한 경우에는 그 사업을 정부가 주도적으로 할 수밖에 없다. 국가 기간산업의 주체는 정부였다. 자유주의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도 도로ㆍ교량ㆍ운하ㆍ항구와 같은 공공사업의 시행을 불가피한 국가의 몫으로 돌렸다. 그러나 공공사업 유지를 위한 경비는 국민의 세금이 아니라 ‘수익자 부담의 원칙’에 의해 충당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수익자 부담의 원칙’이 적용되면 불필요한 공공사업이 시행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정치원리가 아니라 경제원리에 의해 공공사업이 행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철저하게 경제원리에 따라 국가의 공공사업이 행해진다면 국고만 낭비하는 공공사업을 방지할 수 있다.4)

공공사업은 정치원리가 아닌 경제원리로 이루어져야

수익자 부담의 원칙에 따라 거대 국책사업을 수행한다면 세종시 문제는 애초 생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세종시 원안이 시행된다면 대통령은 서울에, 국무총리는 세종시에, 정부 부처는 여러 곳으로 분산된다. 뿐만 아니라 혁신 도시 조성에 따라 부산, 대구, 광주, 전남 등 10곳에 2012년까지 공공기관 124개가 옮겨간다. 국회는 여전히 서울에 남는다. 이렇게 되어도 국정 운영에 문제가 없는 것일까. ‘국가 균형발전’을 명분으로 앞세운 세종시와 혁신도시 계획은 국가 기관과 공공단체를 정부가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정부의 재산으로 생각하고 필요에 따라 이리저리 옮길 수 있다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사고방식에서 나왔다.

세종시의 원형인 행정중심복합도시와 혁신도시는 참여정부의 ‘국가 균형발전’이라는 유토피아적 사고에서 나온 것이다. ‘국가 균형발전’의 논리는 가난한 사람을 돕기 위해 부자로부터 세금을 마구 거둘 수 있다는 소득재분배 정책의 또 다른 변형이다. 소득재분배정책이 ‘자기 책임의 원칙’을 말살하여 수혜 대상자들을 국가에 종속시키듯이 ‘국가 균형발전’은 지역의 자발성과 자기 책임의 원칙을 말살하고 중앙정부에 종속시킨다. 이런 정책은 개인과 지방의 도덕성을 타락시키고 의존성을 키워 결국 개인과 지방의 자존감을 소멸시킨다.

‘국가 균형발전’을 위한 행정중심복합도시와 혁신도시는 선거민주주의라는 마술에 걸린 한국정치의 필연적 결과이다. 좌우ㆍ여야 할 것 없이 모두 선거민주주의가 추동하고 정치인들이 선동하는 유토피아주의에 빠져 ‘원안 고수’, ‘원안+α’, ‘자족도시’를 외치고 있는 것이다. 세종시 문제에 대해서는 참여정부와 이명박 정부가 다를 것이 없다. ‘원안 고수’와 ‘원안 수정’이 모두 ‘치명적 자만’에 빠진 ‘유토피아적 사회공학’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국가의 대의를 위해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과감하게 버릴 정치인은 보이지 않는다. ‘자기 책임의 원칙’과 ‘수익자 부담의 원칙’이라는 자유주의의 원리에 확고한 신념을 가진 정치인은 어디에 있는가? 국민과 국가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겠다는 잘못된 정치인들은 국민과 지방이 자기 책임의 원칙을 내팽개치게 하고 국가가 제공하는 공짜에 길들여져 국가에 의존하게 된다. 공짜만을 좋아하는 국가의존적인 국민의 양산은 정치인들의 정치적 자산이 되어 악순환은 계속된다.

선거민주주의의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야

선거민주주의와 결합된 유토피아주의의 결과는 처참하다. 시시때때로 반복되는 선거 때문에 정치인들은 유토피아주의에서 해방될 수가 없다. 설사 의식 있는 정치인이 유토피아 마술에 빠지지 않고 세종시와 같은 거대 국책 사업이 명백하게 잘못된 정책이라는 사실을 인식할지라도 선거에서 승리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눌려 그것을 포기하지 못한다.

‘국가 균형발전’이 꼭 성취되어야 할 역사적 당위라면 그것은 강력한 정부의 치밀한 계획에 의해서가 아니라 장기간에 걸친 점진적 진화 과정을 거쳐 도달하게 될 것이다.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를 추동한 산업혁명도 국가의 치밀한 계획에 의해 의도적ㆍ정책적으로 수행된 것이 아니라 민간인들이 시행착오의 과정을 거치면서 당면한 사회경제적 조건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자생적으로 생성된 것이다. 산업혁명이 장기간에 걸친 점진적인 진화 과정의 산물이듯이 ‘국가 균형발전’도 중앙 정부의 계획이 아니라 지방과 민간의 노력으로 성취되어야 할 과제이다. 참여정부의 극복이라는 역사적 과제를 안고 출발한 이명박 정부는 이제 세종시에서 손을 떼고 그것을 지방정부와 민간에게 넘겨주어야 한다.

신중섭 (강원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 joongsop@kangwo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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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로의존성’에 따르면 현재의 제도와 구조가 정치행위자들을 이미 확립된 정책 경로에 순응하도록 하기 때문

에 급격한 대규모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이 낮다. 이 이론에 따르면 일단 형성된 제도는 상당기간 안정성을 유

지한다.

2) ‘치명적 자만’은 하이에크가 사용한 말로 “인간은 그가 원하는 바에 따라 그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만들 수

있다”는 잘못된 믿음을 의미한다. 하이에크, 『치명적 자만』, 신중섭 옮김, 자유기업원, 1996, p.62.

3) ‘유토피아적 사회공학’은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듯이 새로운 사회를 설계하고 그 설계에 따라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고 믿는다. 공산주의자들은 ‘유토피아적 사회공학’을 신봉한다. 칼 포퍼, 『열린사회와 그 적들

Ⅰ』, 이한구 옮김, 민음사, 1997, 2006, 9장 “탐미주의, 완전주의, 유토피아주의”, pp.263-278 참고.

4) 애덤 스미스, 『국부론』, 1776, 제5편 제1장 제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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