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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법률주의와 헌법 개정


2009년 8월 국회의장 자문기구인 ‘헌법연구 자문위원회’는 우리나라 재정운용의 기본 틀을 획기적으로 바꾸는 중대한 제안을 하였다. 당시 이원정부제, 대통령 중임제 등 권력구조 쟁점에 묻혀 언론의 주목을 전혀 받지 못했지만, 자문위원회가 제안한 ‘예산법률주의’는 권력구조 개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예산법률주의는 우리나라 재정운용의 중심을 행정부에서 국회로 이관하는 원칙으로 우리나라 국정 운영체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예산법률주의는 예산을 법률로 제정하여 예산에 법률적 효력을 부여하고 법률의 형태로 편성하는 것이다. 예산이 법률이 되면 입법권을 가진 국회는 당연히 예산에 대해 모든 권한을 갖는다. 현행 헌법에 따르면 행정부는 예산편성권을 갖고 국회는 심의확정권을 갖는데, 만약 예산법률주의가 채택되면 국회가 예산편성권과 심의확정권을 갖되 예산편성권만 행정부에 위임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결국 예산법률주의는 예산과 재정에 관한 일체의 권한이 입법부에 귀속된다는 것을 명확하게 규정하는 것이다.


게다가 예산에 법률적 효력이 부여되면 예산은 국가기관뿐만 아니라 국민들에 대해서도 법적 효력을 갖는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법학계는 “예산은 법률이 아니기 때문에 국가기관 내부의 관계에 불과하다”는 해석을 정설로 간주하였다. 그런데 예산이 국민 모두에 대해 법적 효력을 가진다면 예산집행의 해명책임(accountability)은 크게 강화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예산을 법률의 형태로 제정하면 개별 예산항목의 집행방법을 실질적으로 규율하는 수단을 확보할 수 있다. 예산법률주의 하에서는 각각의 예산항목을 법률용어로서 규정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지출용도와 목적ㆍ내용ㆍ제약ㆍ권한과 책임 등 다양한 내용을 서술할 수 있는 것이다. 또 이 과정에서 기존 법률의 예외 및 유예적용을 규정할 수 있기 때문에 사업별로 신축적인 예산집행이 가능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현행 예산서는 예산항목의 명칭과 금액만을 열거하는 통계표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비목별 집행기준 준수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을 뿐 사업의 실질적 효과를 중시하지 않고 있다.


또 예산이 법률로서 성립하면 예산에 대해 대통령의 거부권이 인정된다. 일반적으로 행정부와 의회의 갈등을 해소하는 방법으로서 대통령제 하에서는 의회가 통과한 법률에 대해 대통령이 거부권을 갖고, 의회는 거부된 법률안을 보다 엄격한 요건으로 재의결하는 방법을 채택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와 같이 예산 비법률주의가 채택되면 대통령은 국회를 통과한 예산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다. 이는 우리나라 예산 권력구조의 중대한 결함이라 할 수 있다.


대통령이 예산안을 거부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국회의 지출예산 증액 및 새 비목 설치 제한 규정’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우리나라의 헌법 제57조는 국회가 행정부의 동의 없이 예산항목을 증액하거나 새로운 예산항목을 설치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는데, 이는 국회의 예산심사에 대해 대통령이 부분적으로 ‘선택적 항목거부권(line-item veto)’을 가지는 것과 같다. 그런데 국회가 예산항목의 삭제 또는 감액을 하는 경우에는 행정부의 동의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대통령은 매우 취약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 국회가 대통령의 정책수행을 위협할 정도로 예산을 크게 삭감하여 확정시킨다고 해도 대통령으로서 어쩔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예산법률주의의 채택은 우리나라 재정운용의 중심을 행정부에서 국회로 이관시키고 예산에 법률적 효력을 부여함으로써 예산집행의 해명책임을 강화하고 예산을 법률의 형태로 제정함으로써 예산사업의 실질적 효과(outcome)를 개선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특히 국회가 일방적으로 예산을 삭감하는 경우에 나타날 수 있는 국정파탄을 대비하기 위해서도 예산법률주의의 채택은 필요하다.


그러나 예산법률주의를 채택하여 국회의 재정통제권을 강화하는 데에는 매우 중요한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그것은 국회가 예산 및 결산심사에 대해 국민적 신뢰를 확보하는 것이다. 국회의 예산심사제도가 합리적이지 못하면 국회의 재정통제권 강화는 국가재정의 방만한 운용을 초래하여 국가발전에 재앙이 될 수도 있다. 이러한 사실은 미국의 오랜 경험에서 충분히 확인될 수 있었다. 미국의 재정민주주의는 대통령과 의회가 더 많은 재정권을 확보하기 위해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얻으려는 오랜 경쟁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건국 이래 아홉 차례의 헌법 개정 과정에서 재정조항에 대한 관심은 거의 없었다. 1960년대 이전에는 조세수입으로 국정의 기본 틀을 구축하는 데 급급하였고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는 개발 재정이라는 미명하에 철저하게 행정부 주도로 국가재정이 운용되었다. 재정운용에 다수 국민들의 뜻을 반영ㆍ조정하는 절차보다 국민경제의 기본 틀을 구축하는 보조적 역할로서 국가재정을 인식하였던 것이다. 더욱이 1980년대 후반의 민주화 과정에서도 권력구조ㆍ규제완화ㆍ행정개편ㆍ부패방지 등 재정 이외의 이슈가 중시되면서 재정운용에 대한 국민적 관심은 많지 않았다.


민주적 재정운용에 대한 관심이 본격적으로 분출되기 시작한 계기는 1995년의 지방자치제 실시, 1998년의 외환위기 극복과정 등이라 할 수 있다. 지방자치제를 정착시키기 위해 지방재정 기반을 확충해야 한다는 주장, 그리고 외환위기 극복 과정에서 투입된 공적자금에 대해 제기되었던 국가채무 논쟁 등은 재정운용과 재정제도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크게 불러일으켰다. 특히 2000년대 중반 이후 예산편성에서 성장과 복지 등 다양한 가치의 선택문제가 부각되면서 국가재정은 국민들의 정책요구를 구현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라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급기야 2009년 12월에는 행정부 예산안을 문제로 야당이 국회 회의장을 점거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여ㆍ야 간의 대립이 재정문제로 전환하고 있음을 예고하는 시금석이라 할 수 있다.


재정민주주의란 재정운용에 다수 국민들의 뜻을 반영ㆍ조정하는 절차다. ‘헌법연구 자문위원회’가 예산법률주의의 원칙을 헌법에 확립하도록 요구한 것은 재정민주주의를 구현하고자 하는 국민적 열망을 반영하는 것이다. 구미 선진국들은 예산법률주의를 수백 년 전에 확립하였지만, 우리나라는 이에 대한 경험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도록 지금부터 충분한 논의와 준비가 필요하다.


옥동석 (인천대학교 무역학과 교수, dsock@incheo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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